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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30. 2023

"자연인이 되다"는 "동물이 되었다"는 뜻?

퇴직을 앞둔 많은 중년 남성들의 로망이 '시골로 내려가 자연인'으로 사는 거다. 대학을 졸업하고 짧게는 30여 년, 길게는 40여 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뒤편에는 '일상 탈출'이라는 명제가 따라다녔다는 뜻이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직장을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이고 있는 사투라고 생각하는 거다. 뒤돌아보면 스트레스의 연속이었고 그 결과 몸의 어딘가는 한 두 군데 고장도 나 있다. 이렇게 살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그런데 일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가온다. 정년퇴직이다. 탈출구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하고 언젠가는 벗어던져야 한다는 생각의 종착역에 다달을 즈음에는 TV에서 하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몰아보기로 하루종일 시청한다. 이미 자연인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다. 무얼 먹고 사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은 아닌지, 냉난방은 어떻게 하고 사는지 엿보고 싶어서다. "나도 저들처럼 하고 싶은데"와 "저렇게까지 하며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회의감이 마음 한편에서 논쟁을 한다.


이미 멀리 고향 인근에 조그만 땅을 사서 밭을 일구고 농막을 지어놓는 등 일을 벌인 주변 사람들이나 친구들을 보며 조급함도 생긴다. 주말이면 심어놓은 상추며 열무며 가끔 토마토, 복분자도 들고 와 먹으라고 건네준다. "너도 빨리 시골에 내려갈 궁리를 해봐. 너무 좋아. 나는 주말이 언제 오나 기다려져"라고 충돌질을 할라치면 하루종일 "나는 뭐 하고 있나?"라는 회의감에 보낸다.


그런데 자연인을 아무나 꿈꿀 수 없다. 시골에 작은 땅뙈기라도 살만한 자금 여유도 있어야 한다.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한다. 시골살이는 주말 농장에 감자 고구마 심어 놓고 주말에 왔다 갔다 하며 캐는 수준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밭에서 살아야 하고 산에서 살아야 한다. 또한 이미 눈치챘겠지만 산 속이든 바닷가 근처든 어려서 살아 본 사람만이 버텨내고 살 수 있다. 환경에 적응하는 힘을 백신 맞듯이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도심에서 태어나 크고, 캠핑을 좀 다녔던 실력 가지고는 4계절 한번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한다.


물론 힘듦을 받아들이고 잘 이겨내는 사람들도 있다. 머리 안 쓰고 몸만 써서 생활하고 속 편하고 스트레스 안 받으니 이제야 자기 인생 제대로 살고 있다는 사람들도 있다. TV 속 자연인의 대부분 모습이다. 나름대로 자연에 잘 정착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례다.

어제저녁, 매주 목요일마다 ZOOM으로 하는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 온라인 강의를 듣다가 박문호 박사가 최진석 전 서강대 교수의 강의 중에 들었던 '자연인'에 대한 정의를 전해주셨는데 듣고 머리가 띵했다. 자연인으로 돌아간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잔다. 세상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데로 살고 있으니 행복할 수가 없다"라고 한단다. 최진석 교수는 이런 상태를 '동물의 상태'로 정의를 내렸단다.


'자연인이 되었네'는 드디어 '동물이 되었네'와 같은 말이란다.


먹고 싶으면 찾아 먹고 자고 싶으면 잔다. 그래 딱 동물의 상태다. 자연인의 다른 모습은 동물로 돌아간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참 기막힌 통찰이자 표현이다. 물론 철학자이신 최진석 교수님의 논점은 자연과 합일되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기에 범인들의 어설픈 해석을 뛰어넘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문화적 동물이기에 자연과 합일된 물아일체가 되어서는 자연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문화는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것이자 인간이 머문 흔적이다. 자연 안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 자연과 떨어져 있어야 자연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외부 환경에 좌표를 부여해서 바라볼 수 있을 때 제대로 자연을 볼 수 있다. 자연과 엉겨 붙어 있으면 곧 동물이다.


자연을 보고 감동하고 감탄할 수 있는 사람은 자연과 분리되어 자연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분리된 존재만이 자연을 객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연환경을 바꿀 수 없다. 자연환경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동물이다. 자연을 객관화할 수 있는 인간만이 환경을 바꾸어 왔다.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관점이 아니고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점이다.


자연 속에서 동물로 살면 편하다고 느낄 수 있다. 환경에 따라가면 되니 당연하다.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밭에 나가 옥수수 씨 뿌리고 자라는 거 보며 즐거워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인간의 향기를 놓치면 안 된다. 사색을 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반드시 배정해 놔야 한다. 자연에 그대로 합일되어 멈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내가 더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키워야 한다. 밭에 도랑을 내고 씨를 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식의 근육을 키우고 일상생활에 찌들어 감히 손대지 못했던 일을 찾아 해내는 쾌감도 같이 공존해야 한다. 


소일거리 없어 빈둥거리는 도시의 은퇴자보다는 매일 호미, 삽 들고 가꾸고 키울 것이 있는 시골이 더 보람찰 수 있다. 그 안에 자연을 분리해 볼 수 있는 심미안도 같이 키워보자. 그래야 쉽고 빨리 포기하지 않게 된다. 씨앗이 움트고 싹이 나서 크는 모습에 감탄할 수 있게 된다. 마당에 지렁이 한 마리, 측백나무 그늘 한편이 고맙고 꼬리 치는 복실이의 모습이 사랑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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