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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10. 2023

재수 좋은 날

"재수 좋다"라는 말이 있다. 재수의 한자어는 재물 재(財), 숫자 수(數)를 쓴다. "재물이나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는 운수"라는 뜻이다. 재화나 재물을 셀 수 있을 정도로 소유하고 있으면 재수 좋은 것이라 해석한 모양이다. 셀 것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좋을 테니 재수 좋다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제는 "재수 좋다"는 의미가 확장되어 돈이나 재물의 소유 범위를 넘어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정착한 듯하다. 어떤 곤란한 일에 빠지지 않아도 '재수 좋았다"라고 표현하고 우연한 행운(serendipity)을 만났을 때도 "재수가 좋아서 그랬다"라고 한다. 또한 희화적 표현으로 다가서면 조롱의 표현으로도 엮어든다. "그 녀석은 재수도 좋지. 관운을 타고났어"라고 능력범위 이상의 관직에 올랐음을 빗대기도 한다. 운과 재수가 동급의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출근길에 만나는 비가 장난이 아니다. 장맛비의 본성을 보여주겠다는 듯 미친 듯이 내렸다. 출근할까 말까를 망설여야 할 정도의 강도로 내린다. 비가 내린다고 출근을 포기할 수 있는 배짱은 없다. 바짓가랑이 둥둥 걷거나 신발은 비닐에 싸서 백팩에 넣고 슬리퍼를 끌고서라도 집을 나서야 한다. 샐러리맨의 비애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릴 때면 차로 출근을 할까 망설이기도 한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회사 지하주차장으로 가면 비 한 방울 안 맞고도 출근할 수 있는데 ---


그래도 망설임은 잠시. 비를 안 맞는 효용성보다 윈도브러시가 감당 못할 정도의 폭우로 인해 노심초사 운전을 해야 하는 걱정이 더 크게 작동하면 차라리 차양이 큰 우산을 들고 가는 쪽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장우산을 챙기고 신발도 물에 젖어도 괜찮은 것으로 골라 신고 현관문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탄다. 비를 조금 맞을 것도 각오를 한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이런! 비가 잠시 그쳤네"

이렇게 재수 좋을 수가!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맞췄네. 멀리 앞 산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보니 금방 다시 올 비는 아닌듯하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퍼붓던 비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 대지로 내려온 모양이다. 잠시 다른 곳에서 수증기가 몰려오지 않는 한 출근길에는 내리지 않을 요량이다.


우산을 펴보지도 못하고 룰루랄라 손에 들고 걷는다.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겨 요리조리 피해 걸어야 하지만 우산을 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 아침은 재수 좋은 날임에 틀림없다.


비 그친 틈사이로 새들의 지저귐도 들려온다. 비가 억수로 내렸다면 우산 위로 쏟아지는 소리의 향연에 묻혔을 소리다. 우산 처마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흔들림과 소리도 운치 있지만 잠시 비가 그친 사이로 들려오는 새들의 소리 또한 아침의 청량함을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온갖 생물이 촉촉하다. 생명이 꿈틀거리고 생명이 흘러간다. 길가에 심어진 소나무가 머금고 있던 비의 무게와 느티나무 잎에 머물던 물의 양, 배롱나무 꽃잎에 맺혔던 동그란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다름도 보인다. 비 그친 출근길에 마주하는 모든 풍경이 선선하다. 기온이 높았다면 습하고 꿉꿉했을 피부에 오히려 수분을 공급하는 역할로 물의 위치가 바뀌어 있음도 알아챈다. 지금은 물의 세상이다.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아침처럼 잠깐잠깐 멈추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주변을 두리번거릴 여유를 주었으면 좋겠다. 잠시 그친 빗사이로 출근하면서 그 행운에 재수 좋다고 기분 좋아하는 단순함을 드러낼 수 있어서 좋다. 이렇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재수 좋다고 들이대고 자기만족하는 일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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