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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25. 2023

같은 말을 하는데 왜 다른 뜻으로 받아들일까?

사람들과의 대화가 어려운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같은 단어와 주제를 놓고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단어나 문장이나 주제에 대해 각자의 언어로 각각의 해석으로 각자의 생각을 내놓게 된다. 단어와 문장이 같으니 같은 뜻으로,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해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대화가 안 되고 토론이 안되고 나중에는 살벌한 감정만이 남는다.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주제발표나 토론을 하다 보면 엉뚱하게 산으로 가는 경향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주제를 벗어날 때마다 진행자가 제대로 방향을 이끌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회의나 토론 시작 전에 주제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공유하지 못해서일 경우가 태반이다. 각자의 단어와 언어로 말을 하니, 당연히 해석도 중구난방이 되고 토론은 산으로 가서 별다른 결과나 성과 없이 '다음번에 다시'를 외치고 만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자들이 모여 연구결과를 내놓고 의견을 듣고 검증하는 모임이나 자리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과학의 범위에서는 결과의 논증이 확실히 드러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하나라도 예외가 발견되거나 하면 즉시 주장은 파기되고 그 결과를 인정하게 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확연히 보여주기 때문에 반론을 제시하고 성질낼 필요가 없다. 결과가 말을 해주기 때문이다.


최근 과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상온 상압 초전도체 물질을 국내 벤처기업이 개발했다고 주장했다가 지난주에 국제 학술지 네이처가 "지난 한 달여간 각국 연구진이 이 물질을 직접 만들어 검증했지만 어느 곳도 초전도체임을 입증하지 못했다. 초전도체가 아니라 절연체였다"라고 밝혔다. 초전도체 관련 기업의 주가를 폭등시키며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개미들은 한순간에 폭망을 해버렸다. 과학의 세계는 검증하는 세계이고 인문의 세계는 환상을 쫒는 세계임을 같이 증명해 버렸다. 과학의 세계는 명확하다. 검증과정을 통해 확실함을 보여주면 된다. 아니면 이번 초전도체 소동처럼 한방에 꼬리 내리고 사라진다. 연구진들은 다시 소재를 바꾸는 등 수많은 실험을 통해 확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매진을 할 것이다. 그것이 과학 발전의 토대이자 과정이다. 건강한 진화의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자들이 모인 토론회나 모임에서는 실체가 없기에 각자가 왕이요 각자가 대장이다. 자기 말이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한심하게 들린다. 논리적 말의 전개일 뿐인지라 검증되지 않고 증거를 들이댈 수 없다. 장황하고 거창한데 듣고 나면 남는 게 없다. 해결책도 없고 대안도 없다. 그저 목소리 큰 놈이 왕인 것이다. 목소리 크고 말 많은 사람의 주장을 따라가게 된다. 그나마 분위기에 휩쓸려 따라가기 싫으면 핏대 올려 자기주장에 열변을 토해 반전시키려 하는 논쟁의 현장으로 바뀐다. 말싸움의 진수가 펼쳐진다. 검증되지 않은 환상을 쫒았던 주식시장의 불나방들이 타 죽은 현상의 재판이 아닐 수 없다. 리처드 파인만이 말한 '거만한 바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집단지성의 발현을 목표로 한다. 다양한 의견을 듣다 보면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속출하고 그 안에 해결책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고 합리적으로 버무리면 훌륭한 결론도 도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회의나 토론회는 문제를 지적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태만이다. 회의 참석자나 토론자들이 서로를 말싸움으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패널들을 경쟁자로 보는 순간, 그 토론회는 하나마나다. 앞에 사람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치고 들어와서 논리 전개를 비판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비판이 비난으로 바뀐다. 몇 마디 발언하는 걸 보면 내가 말로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 꼬리를 내릴 상대인지 눈치로 알아차려 버린다. 말로 기싸움이 오고 가고 서로 지지 않기 위해 핏대를 올린다. 본질은 사리지고 허상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결과는 뻔하다. 지지부진 문제제기하는 수준으로 시간만 허비하고 시간초과에 걸려 부랴부랴 종료를 한다.


특히나 문제해결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는 언론매체의 역할이 지대하다. 문제제기만 하는 언론은 반쪽 언론이다. 치우치지 않는 객관성을 생명으로 한다고 자부할 수 도 있겠으나 감시견의 역할보다는 안내견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작금의 언론사 역할의 중요성이다. 국내 언론단체나 매체에서도 솔루션 저널리즘(solution journalism)을 주장한 지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눈에 뜨이는 언론사가 없는 이유는 대안 담론을 제시하고 엮어나갈 환경을 못 만들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하루하루 마감하기 바쁜 취재 환경에서 언감생심 대안을 추적하고 솔루션을 제시할 만큼 탐구하고 취재할 시간조차 없다. 내일이라는 단어가 없는 하루살이 인생이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것과 같다.


같이 변해야 한다. 같이 움직여야 한다.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나 상대를 바라보고 인정해야 한다. 서로의 대화에 있어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없는지 함께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좀 더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고 대안까지도 같이 도출해 낼 수 있다. 과학적 사고의 바탕은 이만큼 중요하다. 과학은 세상을 보는 눈의 높이를 더 높이고 더 깊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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