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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28. 2023

이집트 갤러리가 집으로 오다

저는 그림에는 문외한입니다. 그릴 줄은 더욱 모르지만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지, 잘 그린 그림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 좋은가보다 하고, 유명한 작가들이 그린 그림이니 더 좋은가 보다 하는 정도입니다. 이번달 여름휴가를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보내면서 고흐박물관, 렘브란트 박물관을 비롯하여 루벤스의 제단화가 있는 엔트워프의 성모마리아대성당을 찾아가서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앞에 서보기도 했습니다만 왜 잘 그린 그림인지, 애니메이션 속의 네로와 파트라슈가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했는지 되물어도 잘 안 와닿았습니다.


나름 여기저기 자료와 유튜브 동영상을 뒤져 기초지식을 갖고 간다고 했음에도, 심지어 고흐박물관에서는 오디오가이드를 예약하고 귀에 꽂고 들었음에도 그런가 보다 정도의 감흥밖에 못 느꼈습니다. 고흐의 여러 자화상과 '해바라기' '노란 집' '침실' '꽃피는 아몬드나무' 등등의 그림을 봤는데도 무덤덤하게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귀로 들리는 오디오가이드 해설을 그림과 매칭되어 듣지도 못했습니다. 알고 봐야 보이는데, 눈앞에 있으면서도 그 진가를 알아채지 못하고 못 느꼈던 것입니다. 그저 "나도 그 그림 직접 봤어'만 남았습니다. 부끄러울 뿐임을 고백합니다.


그림에 이렇게 문외한인 저에게 지난 주말, 커다란 박스에 그림 액자가 20개 포장되어 도착했습니다. 액자에 잘 표구(表具, mounting)된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 그림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풍경이 담긴 수채화가 16개, 그리고 아직 표구되지 않은 작은 파피루스 원본 4개가 들어있습니다.


이 그림들을 보내준 분은 제가 잘 아는 가까운 지인분이십니다. 70대 중반의 연세이신데 최근 이사를 준비하시면서 그동안 간직해 오신 손때 묻은 물건들을 모두 정리하고 계신 중이셨습니다. 이 그림들은 그분께서 평생 해외를 드나드시는 직업을 가지셨기에 오며 가며 하나둘씩 모으신 것들입니다. 이집트 파피루스 그림들을 많이 소장하고 계신 이유는 좀처럼 가기 힘든 곳이라 갈 때마다 갤러리에 들러 하나둘씩 사셨답니다. 


"나도 그림의 가치는 잘 몰라. 그냥 갤러리에 들러 둘러보다가 매장 직원이 추천하는 그림을 하나둘씩 샀을 뿐이야"라고 애써 변명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모으신 이 귀한 그림을 저에게 보내셨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그림들이 집 거실하고 손님 응접실에 걸려 있은지가 20-30년도 넘었는데 그동안 집에 왔던 수많은 사람 중에 이 그림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자네가 집을 다녀가며 벽에 걸린 파피루스 그림에 관심 갖고 보고 이것저것 물어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자네에게 보냈네"라고 하십니다.


"제가 그 그림을 받을 만큼 그림에 식견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 지금부터라도 그림에 대한 이해를 넓혀보시게"라고 하시며 전화를 끊습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좁은 집 방 한 칸을 갤러리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림 포장 박스를 하나씩 벗겨봅니다. 이집트 상형문자인 헤어로 글리프(Hieroglyphs)와 사람의 옆모습으로 평면 입체를 구현한 전형적인 고대 이집트 그림이 파피루스에 담겨 있습니다. 그림과 문자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전혀 해독할 수 없으나 그림의 겉모습을 통해 전해오는 느낌만은 알 듯합니다. 이 그림들 덕분에 이집트 상형문자인 헤어로 글리프까지 찾아보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이집트 상형문자는 1822년 프랑스의 샹폴리옹(Champolion)이 1799년 발견된 로제타석의 비문을 판독하면서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형문자와 연결된 알파벳을 하나하나 찾아봅니다. 그렇다고 그림에 적혀있는 상형문자의 뜻을 알아먹을 수는 없습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욕을 부추기는 정도입니다. 궁금하면 못 참는 성격을 자극합니다.


사실  이 그림들은 제 지인의 여행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추억의 일기장일 겁니다. 그림의 가치는 이야기할 수 조차 없습니다. 추억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돈보다 귀한 가치를 저에게 주셨을 때는 어떤 심정이셨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간직해 오신 것을 보내주실 때는 돈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돈을 보내거나 드려도 받지 않으실 것이 자명합니다. 그렇다고 그림을 이렇게 덜렁 받고 감사하다고 전화만 드리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맛집을 찾아 음식을 포장해서 싸서 들고 잦아 뵈러 갔습니다.

"자네에게만 보냈을 거라 착각하지 말게나. 그저 자네가 보고 관심 갖던 것만 보냈네. 부담 갖지 말게. 내 나이 70대 중반을 넘겼네. 이제 이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갈 거네. 어차피 가져가지도 못할 건데.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좋은 일 아니겠나. 짐 정리도 할 겸 해서 보낸 거니 그냥 잘 감상하시게나. 더구나 그 그림들이 돈 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네. 관광지 갤러리에서 산 거니 말일세"라고 그저 큰 가치가 없는 그림이니 부담 갖지 말라는 당부셨습니다.


집으로 운전하며 돌아오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노년에 접어들어 주변을 정리한다는 의미가 멀까?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 일까도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제 지인께서 건강이 안 좋으신 것도 아닙니다. 매일 수영장을 20번씩 왕복을 하실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시는 모습은 제게 많은 생각을 던져 줍니다. 나도 저 나이가 되면 깔끔하게 내 주변을 정리하고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다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소유를 주장하셨던 법정 스님도 떠오릅니다. 제 지인께서 평생을 여행하셨던 것처럼, 이 지구별 여행을 마치실 때까지 지금처럼 건강한 모습 계속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하고 고마운 분이 곁에 계셔서 행복한 사람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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