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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29. 2023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을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선입견을 갖게 될 때 흔히 표현하는 말이다. 과연 하나를 보면 나머지 행위를 알아맞힐 수 있을까?


어설픈 점쟁이들이 주로 추론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이런 행위가 그동안 먹혀들었다는 것은 나름 행동에는 패턴이 있음을 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행동은 상관관계(correlation)보다 인과관계(causality)가 더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행동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목적이 인과관계를 만든다. 앞 선 행위가 원인으로 작동해야 뒤에 올 행위가 만들어지고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패턴의 집합을 대유(代喩 ; synecdochically , 어떤 사물의 특징이나 속성으로 그 사물 자체를 표현하거나 부분으로 전체를 혹은 전체로 부분을 나타내는 수사법)로 표현한다. 대유. 말이 어렵다. 대신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쉬울 듯하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빵은 식량의 대명사로 사용한 대유법의 단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행동이 됐든 말이 되었든 그 사람이 하는 행위의 일부분이고 '열'은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대신하는 단어다. 행동 한 가지만을 보면 나머지 행위도 어떻게 할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화의 오류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보편화의 오류는 군중 사이에서 세력을 규합하는 큰 동력으로 작동한다. 비슷한 성질과 성격을 갖고 있는 부류들로 규정짓고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에너지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에 자연스럽게 이런 범주화가 이루어진다. 내가 어느 범주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그 사람의 속성을 결정짓고 그 속성에 따라가다 보면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양성된다.


다시 한번 앞의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을까?"

다시 물어보면 아닐 수 도 있다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하나'는 진실일 수 도 있지만 가식일 가능성이 더 많을 수 도 있다. 질문에 숫자를 좀 더 넣어보자 "다섯을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로 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열을 알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질 테니 하나를 알 때보다 신뢰성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것이다'라는 가정은 반드시 선행 조건이 있어야 한다. 미래를 유추할 수 있으려면 과거 데이터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선행조건 '하나'로 미래의 결과를 예측해야 한다. 오류 투성이의 결과가 나올 것이 뻔하다. 절대로 하나를 보고 나머지 열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속단을 내리고 '그런 사람이야'로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래서 혈액형을 묻고 근래에는 MBTI를 묻는다. 어느 범주에 속해있는지 빨리 파악할수록 상대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와 비슷한 성향에게는 더 친근해질 수 있고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류에는 눈길조차 마주하길 꺼려한다. 역시 에너지 최소화를 통해 생존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기에 적응가능한 방법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가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인과의 자연진화를 뛰어넘어 방향이 없는 상관관계로도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발달시킨 종이다. 도저히 과거의 데이터만으로는 미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결과를 도출해 낸다. 소통과 연대와 협력을 통해 통섭하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하나'를 가지고는 미래를 살 수 없다. 여럿이 융합되어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가 나온다.


선입견을 갖고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껍데기만을 보고 있을 수 있다. 참 사람인지, 속된 사람인지는 계속 만나보고 지켜보고 부대껴봐야 한다. 한두 번 만나보고 속물이네 진국이네를 따지는 보편성의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진짜 진국은 오래 끓여야 맛이 우러나듯이 사람도 오래 만나봐야 그 진가를 엿볼 수 있다. 한두 번 만나 잘해 주는 것은 사기일 가능성이 100%이거나 어떻게든 나의 도움을 끌어내거나 돈을 빨아먹을 심사의 발로일 가능성이 더 큼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를 봐서는 절대 나머지 '열'을 알 수 없다. '하나'로 '열'을 판단할 것이라는 것조차 알고, 거기에 대응하고 있는 교묘한 능력의 소유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한 능력도 중요하지만 악한 능력도 겸비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경계를 경계하는 것은 최선을 지키는 유일한 방편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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