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다' '행복하다'는 어디서 오고 어디에 있는가? 나는 과연 지금 편안하고 행복한가? 아니면 뭔가 불안하고 불편하고 불행한 상태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러 혼합된 상태에 있어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인가? 여러 색깔의 물감이 뒤섞여 점점 검은색 바탕으로 바뀌어가는 혼돈의 상태에서 그중 하나의 색깔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통합과 통섭의 용광로에서 밝게 빛나는 것을 편안과 행복과 사랑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표현일까?
수많은 질문 중에 오늘은 한 가지 생각을 화두처럼 집어드는 것이 가능한가? 한 생각 부여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면서도 계속 질문의 꼬리를 붙잡으려 하는 이유는 뭔가? 면벽수도하는 수도승은 동안거 기간 동안 정말 한 생각만을 잡고 있을까? 옛 첫사랑의 연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수 도 있을 테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고 남겨둔 어머님의 따뜻한 쌀밥 한 그릇과 소고기 미역국에 입맛 다시며 좌선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떤 자세가 진정한 수도승의 모습일까?
수도승과 수도사의 모습이기 이전에 인간의 모습일 텐데 그 근원을 억누르기 위한 고행이 올바른 길일까? 그런 고민 속에 파행을 했다고 해서 정말 죽비를 맞을 만큼 잘못한 것일까? 극단의 행위를 추구하는 일부 사람들은 차치하더라도 우리 같은 범인들도 정말 많은 속된 생각과 행동들을 할 텐데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은 어디까지일까?
답도 없는 질문만을 쏟아내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잡생각의 끝머리임을 눈치챈다. 한 생각 이어가지 못하고 계속 생각이 바뀌는 것이 인간이 가진 본능이다. 오히려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한 가지에 몰두한다.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주시하는 독수리의 눈과 사바나에서 풀을 뜯는 영양을 노리는 사자의 뒷다리 근육 움직임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인간도 먹을 것을 앞에 두고는 침을 질질 흘리며 눈이 반짝반짝하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잡념과 잡생각의 연속은 공룡과 맹수에 쫓기던 미약한 포유류 2억 년의 역사가 유전인자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생각에 사로잡혀 멍하니 멈추고 있던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맹수들의 뱃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고 두리번거리고 도망 다니고 회피했던 선조들의 후예로 살아남았다는 증거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순간도 집중하지 못하고 잡념에 휩싸인다고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세상의 지배자로 잠시 군림하게 되면서 생존의 위협이 예전같이 긴박해지지 않음에 따라 오히려 한 생각에 몰두하는 자가 생존에 더 유리한 조건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렇게 자연선택의 환경은 일방향이 아니고 360도 다방향이 적용되는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
호모사피엔스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되었든 집중하는 자가 성공한다. 집중하기 위해서는 주변 환경이 편해야 한다. 한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 조건에는 수만 가지의 요소들이 덕지덕지 존재의 이유를 들이대며 달라붙는다. 대략적으로 열거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경제력이 갖추어져야 함은 자명하다. 당장 끼니 걱정하며 먹고살기 바쁜 사람이 앉아서 좌선만 할 수는 없다. 또한 속된 말로 시간도 많아야 한다. 놀고먹을 수 있는 분위기에서 오히려 창작이 싹트고 예술이 피어난다. 호모사피엔스는 그렇게 생겨먹었다. 빈둥빈둥 대면 아무 생산성이 없을 것 같지만 그 빈둥댐이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창의성의 발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인간이라는 종은 복합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집중과 편안함과 행복함을 위해 인간은 훈련과 규율과 규칙(Discipline)을 만들었다. 종교가 그렇고 법이 그렇고 관습이 그렇다. 일 개인적으로는 하루 일과를 만들고 계획을 하고 그것을 수행해 내는 과정의 연속 사이에 휴식을 만들어 루틴을 꾸리기도 한다. 그 틀 안에 있으면 편안해지고 집중이 잘 되고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단순 반복되는 일이기에 에너지가 최소화되는 상태, 그래야 오래 지속할 수 있다. 이것이 편안함과 행복의 원리다. 편안함과 행복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기에 잠시 잠깐이라도 그 지속성을 늘리고자 루틴을 만들어 해당 시간을 늘리고자 하는 노력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다시 묻자. 묻는 이유는 답을 찾기 위한 것이지만 묻기만 해서는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다는 모순에 빠진다. 질문에 답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질문에 들어 있어야 답도 찾을 수 있다. 질문만 던져서는 허무해진다. 절대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진다는 행위는 생각이 되었든 행동이 되었든 무언가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정답을 찾기보다 해답을 찾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자연에 답은 하나일 수 있지만 인간에게 답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안함과 행복의 질문은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 자기만의 편안함과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질문과 정의를 다시 내려보자. 나에게 편안함과 행복은 무엇인지 말이다. 나에게 편안함과 행복은 "그대가 제 곁에 계셔서"가 결론이다. 그대가 제 곁에 계셔서 정말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감사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