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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01. 2023

나의 확신도 사실이 아닌 가정 중의 하나일 뿐이다

세상의 온갖 사건 사고와 행위를 뒤집어보면 각자가 갖고 있는 확실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판단인지 아닌지는 타인의 시각일 뿐이다. 일을 저지르고 행한 당사자에게는 그럴만한 이유와 확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나쁜 것이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괴롭히고 피해를 주는 사건들을 너무 자주 접하게 된다.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악인일까? 상대를 이용해 먹으면 자기의 에너지를 최소화할 수 있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일까? 그런 종자들을 척결하는 기막힌 묘수는 없을까? 고민하게 만든다.


타인의 행위를 예로 들 필요도 없다.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도 확신이 들었기에 감행하고 있다. 확신이 없으면 절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심지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의 부류를 혐오하는 자체도 나의 확신에 의한 발로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다, 입었다는 나의 판단은 정확한 사실일까? 진실일 수는 있어도 사실이 아닐 수 도 있다. 확신(確信 ; convince)은 "굳게 믿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감각 데이터를 종합해 볼 때 그럴 것이다, 그렇게 행동해도 될 것이다라는 예측의 최고 단계를 확신이라고 한다. 확신이 서야 한 발자국이라도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이 확신이 '가장 그럴듯한 가정'일뿐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확신을 사실로 착각한다. 예측은 우리의 브레인이 창작해 낸 모델일 뿐이다. 자연이라는 사실의 일부일 수는 있어도 사실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의견과 사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의견이 강해지면 사실로 착각하게 된다.


대부분 사회 갈등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 '가장 그럴듯한 가정'을 놓고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힐난하고 아귀다툼을 한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끌어내리기 위해 협잡을 일삼고 조작을 하고 심지어 작당을 하여 함정에 빠트린다. 바로 상대를 없애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확신 때문이다. 내가 옳기에 상대는 틀렸다고 확신한다. 가장 하수의 생각이자 행동이다. 확신에 찬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마음을 굳혔기에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에너지 최소화로 손실이 없기에 안정적이다. 상대의 이 확신을 깨려고 하면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그나마 확신을 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도 없다.


하지만 당장 싸움의 현장에서는 이 하수의 생각과 행동이 먹혀든다. 어떻게든 이겨야 생존할 수 있다는 다급함과 두려움이 '가장 그럴듯한 가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바로 현장에서 작동하는 것이냐 아니냐가 승패를 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계해야 한다. 확신에 찬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가끔 자녀들을 결혼시킨 꼰대세대들이 손자 손녀 사진을 꺼내 들고 자랑질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자기의 유전자를 담고 있는 새끼들이니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울까만은 그것은 자기만의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새끼들은 대부분 귀엽기는 하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별로일 경우도 있다.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해줄 뿐이다. 이런 손자 손녀 자랑질의 본질도 긍정적 환상에 대한 확신의 진화 때문이다. 내 새끼들이 귀엽게 보여야 더 잘 돌보게 된다. 귀엽지 않으면 돌 볼 마음이 생기겠는가? 생존과 번식을 잘하기 위한 인지편향의 결과가 자랑질로 드러났을 뿐이다.


나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하는 것이 '확신'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확신은 개개인의 개별적인 감정이자 가정일 뿐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람마다 확신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확신이 신념이 되어 행동으로 이어지는 행위가 천차만별로 다르고 그 범위에 우열을 따질 수 없다는 소리다.


이는 타인의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고 나아가 내 생각이 틀릴 수 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절대적 확신은 없고 상대적 확신만 있다고 인정하면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을 인정할 수 있고 열린 태도로 세상을 볼 수 있어 보다 명확하게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확신의 범위를 넓히는 과정에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의 경험치를 높여서 최대한 자연의 사실로 다가가도록 해야 한다.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세상의 극히 일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가설과 가정의 영역을 확장해 오류를 최소화하는 생존의 극한 환경 속에 놓여있는 숙명을 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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