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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26. 2023

'쓰다'의 맛을 쓰다

'쓰다'는 맛을 분류하는 단어의 하나다. 한글의 '쓰다'는 주로 '글을 쓰다' '사용하다' '소비하다' '머리에 얹어 덮다' 등을 표현할 때 등장한다.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데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맛으로써 '쓰다(bitter, 苦)'는 것은 자기 보호 물질을 감지하는 것이다. 쓰다는 것은 독이다. 이동하는 움직임을 멈춘 식물이 생존하기 위해 개발한 특수약품이다. 먹으면 괴롭고 심하면 죽을 수 도 있다는 경고다. 참으로 교묘한 생명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이 깃들어 있는 모든 존재는 자기 보호 물질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다. 냄새로, 맛으로. 촉각으로 심지어는 시각적 험악함으로 드러낸다. 주로 냄새로 포식자들의 접근을 경고하는데, 동남아시아 열대우림에서 서식하는 라플레시아(rafflesia)는 악취가 나는 꽃으로 유명하다. 이는 파리를 유인해 수분하는 식물이기에 그렇다. 공생관계인 생물에게만 접근을 허용하는 열쇠로 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꽃의 대명사인 장미는 가시를 만들어 꽃을 따먹는 동물들을 경계했다. 어떠한 형태와 방법을 동원하던지, 반드시 생존할 수 있는 특기들은 하나씩 개발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지금 우리 눈에, 우리 주위에 그 존재를 뽐내고 드러내고 있다.


맛으로써의 '쓰다'는 화학적 속성이다. 맛을 감지하는 혀의 미뢰에 닿아야 비로소 어떤 맛인지 감지할 수 있다. 먹어봐야 안다는 것이다. 달면 먹고 쓰면 뱉어야 한다. 엄중하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경계밖에는 없다. 물론 고통받다 회복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괴로움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쓴 맛을 감지하는 혀의 미뢰가 단맛을 감지하는 수용체의 숫자보다 5배 정도 많이 분포되어 있다. 뚫지 못하는 방패를 만들면 이를 뚫을 창을 어떻게든 만들어내어 적응하는 윤회의 고리가 생명의 진화다.

인간은 영악하여 이 쓴 맛을 중화하는 방법까지 고안해 냈다. 쓴 맛을 다스리고 제거하고 순화시키는 방법으로 삶고 우리고 볶고 끓여 자연의 위험을 제거하는 묘수를 알아냈다. 이 묘수는 '쓴 맛'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어원의 의미까지도 좋게 순화시키는 기능으로 바뀌기도 한다. 바로 맥주 맛이다. 유독 맥주맛을 표현할 때 쓰다는 bitter는 좋은 맥주를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아일랜드의 기네스 드래프트가 대표적 bitter 맥주다. 


한국인의 식탁에서는 쓴 맛도 반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고들빼기다. 쓴 맛을, 입맛을 돋우는 용도로 전환시켜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맛의 정점이다.


"쓴 맛이 어떻게 맛이 될 수 있지?" 의문이 들겠지만 고들빼기김치의 쌉싸름한 쓴 맛에 익숙해지면 쓴 맛의 독특함에 빠져들게 된다. 맛은 익숙함이다. 익숙함은 문화가 되고 풍토가 된다. 


다시 '쓰다'의 어원으로 돌아가 보자. '쓰다'의 고어는 'ㅄ 다'라고 한다. '친숙하지 않은 것' 즉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변형되었다고 한다. '쓰다'의 단어 용례를 찾아보니 무려 1,000개도 넘는다. 그중의 하나로 맛의 종류를 표현하는 단어로 들어와 있다. 


맛을 넘어 인생의 쓴 맛을 봤는가? 조직의 쓴 맛을 본 적이 있는가?  맛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고 두리뭉실한 것처럼, 삶의 쓴 맛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방향등이다. 목표와 동기를 만드는 반죽이다. 쓴 맛은 그렇게 인생의 향기를 버무리는 결정적 향기다. 삶이 늪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 그때 쓴 맛의 경험은 아주 중요한 멘토가 된다. 사는 것이 달달하기만 하면 그 또한 지루하다. 우여곡절이 있어야 스릴 넘치고 긴장하게 된다. 그게 사는 것이다. 너무 무거울 필요도 너무 가벼울 필요도 없다. 그게 사는 것이고 살아내는 것이다. 쓴 맛은 그렇게 조화롭게 존재하고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맛의 어울림이다. 사는 게 그렇다. 맛의 혀놀림이다. 침에 녹아서 스며드는 화학반응의 감지다. 그중의 하나를 '쓰다'라고 한다. 지금 '쓰다'를 쓰고 있다. 글쓰기 참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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