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Jan 15. 2024

있지만 없는 존재

쉼이 있는 주말을 보내고 활기 있는 월요일 아침을 맞고 계신가요? 추울 것이라고 예보된 주말이었지만 토요일은 바람 한 점 없이 맑았고 기온도 영 도 주변을 맴돌아 한겨울 치고는 나름 포근한 하루였고, 일요일인 어제는 낮에 궂은비가 내리더니 눈으로 바뀌어 내리는 혼돈의 날씨를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날씨에 따라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저 따라가고 적응할 뿐입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스키장으로, 골프장으로 나가, 운동으로 환경을 이겨내고자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들은 대단한 정열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도 지난 토요일은 갑자기 잡힌 골프모임으로 영종도를 다녀왔습니다. 지난해 11월 납회를 하고 두 달여만에 필드로 나갔습니다. 저는 그린이 어는 겨울 골프는 안 나가는 게 철칙이었는데 그늘집에서 어묵탕에 정종대포 한잔하고 오자는 꼬드김에 빠져 갔다 왔습니다. 그린이 얼어있어 어프로치 샷으로 그린을 겨냥하면 공이 산토끼 뛰어다니듯 그린 뒤편으로 튀어 도망가는 터라 겨울 골프 스코어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습니다만 91개나 치고 왔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최악의 스코어를 기록했으나 겨울 골프라고 위안을 삼아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가 주는 힘은 엄청나, 91의 숫자가 골프 끝내고 집에 오는 내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닙니다. 그래도 나름 1년에 대여섯 번은 70타대  도 치고 보통은 80대 초중반 스코어를 쳐 왔기에 드는 자괴감일 겁니다. "그린 에지에 떨어트려 굴러가게 힘 조절을 했어야지" "그 정도 힘 조절도 못하면서 스코어 많이 나왔다고 구시렁대는 것 자체가 실력이 없다는 거야"라는 핀잔을 들어가며 올해 첫 시즌 개막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애당초 기대했던 그늘집 어묵탕과 정종대포의 맛은 역시나 일품이었고 골프 치는 내내 바람도 없이 나름 포근해서 바람막이 겉옷을 벗고 18홀 내내 돌아다닐 정도여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가까운 고등학교 선배님의 자녀 결혼식이 있어 다녀왔습니다. 1월인데도 주말마다 결혼식 청첩장이 메일함에 쌓여 들어옵니다. 지난주에도 다녀왔는데 이번주에도 또 갔다 왔습니다. 자녀들 결혼시키는 나이가 되었다는 증거일터입니다.


결혼식 하객의 역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옷을 갈아입고 차에 있던 골프백을 매고 아파트 실내연습장으로 내려갑니다. 토요일 기록한 최악의 스코어에 대한 반성의 샷 연습을 할 요량입니다. 어제는 날씨도 꾸물꾸물해서 그런지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스크린골프를 치고 있습니다. 저는 스크린 안 친지 3-4년은 되는 듯합니다. 필드에서 치는 것과는 또 다른 기술이 필요한 듯하여 스크린보다는 샷 연습하며 운동하는데 집중하고 스크린은 아예 접었습니다.

한참 샷 연습을 하다 잠시 쉬는 터에 테이블에 놓인 주말 신문에 눈이 갔습니다. 주말판이라 신문 한 면을 차지하는 긴 기획기사들이 눈에 띕니다. '중앙 SUNDAY'입니다. 기획을 참 잘하고 있는 신문이라 읽을거리들이 많아 애독하고 있습니다. 긴 호흡의 기사 중에 눈길을 머물게 하는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잠옷바지 차림에 양말도 안 신은 슬리퍼를 끌고 있고 손에는 비닐봉지를 든 두 소녀의 뒷모습입니다. 사진작가 신희수 씨가 찍은 '네버랜드' 시리즈 중 한 장이랍니다. 기사의 제목은 "어른들은 볼 수 없는 '네버랜드'의 아이들"입니다.


상의는 나름 털옷을 입긴 했지만 이 추위에 맨발에 슬리퍼라니---


한 장의 사진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는 사진가 신희수는 "아이들의 얼굴에 포커스를 맞출 수가 없었다. 대신 길 위에 서있는 그대로, 그저 뒷모습만을 찍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지도 못한 채 집을 뛰쳐나온 두 소녀의 잠옷, 딸기와 도형이 그려진 분홍색과 하늘색 잠옷이 이제 열다섯, 열여섯 인 나이를, 뒷모습을 비추고 있는 빛과 두 발이 향한 방향의 어둠이 경계에 선 아이들의 현실을 그 어떤 다큐멘터리 사진보다 극명하게 보여준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지만 없는 존재'로 치부되는 사람들 중에 노숙자와 도시빈민도 있지만 이렇게 집과 학교를 나온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외면하고 고개 돌린 사람들입니다.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술 많이 마시고 지저분하고 더러워서 저렇게 되었다고 온갖 외면할 구실을 가져 다붙여 박제시켜 버립니다.


유난히 눈도 많이 내리는 이 추운 겨울에 잠옷바지에 양말도 안 신은 슬리퍼 차림의 청소년들이 거리를 서성이고 있을 모습에 안타까움이 엄습해 옵니다. 제발 어디 따뜻한 곳이라도 들어가 있을 곳을 찾아가면 좋을 텐데, 어디 차가운 바람이라도 막을 곳에서 뜨끈한 라면이라도 제대로 먹고 있었으면 좋을 텐데라는 간절한 기원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있지만 없는 존재'들이 찾아가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가 되물어 봅니다. 수많은 사회봉사단체들이 있고 수많은 자연봉사자들이 계십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서성이는 '없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숙제이기도 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있지만 없는 존재를 보는 혜안을 장착해야 합니다.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는 따뜻함을 사회 시스템이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도록, 자포자기하여 나락으로 빠지지 않도록 사회가 지켜주고 손잡아 주어야 합니다. 미담으로 소개되는 몇몇 독지가의 노력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사회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해야 하고 따뜻한 밥이라도 끼니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소박한 희망일 테지만 그것이 인권이고 이것이 지켜지는 사회가 제대로 된 선진국가일 겁니다.

작가의 이전글 정보는 디테일해야 힘을 갖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