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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25. 2024

누구에게는 당연하고 누구에게는 당혹스럽다

누구에게는 당연한 것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당혹스러움으로 보일 때가 있다. 삶의 다양성이지만 이 다양성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제각각 자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범위를 넘어서면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넘어야 할 경계이지만 경계를 넘는 대신, 선을 그어 구획을 짓고 그 안에 안주하는 편이 더 안락하고 편하게 느껴진다. 본성의 한계는 늘 그렇게 경계 지어진다.


이런 삶의 다양성에 대한 모습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곳에서 드러난다. 근래에는 양극단으로 쏠려가고 있어 불안한 감도 없지 않다. 중간에 서 있으면 회색지대라고 욕먹는다. 줏대도 없다고 힐난을 듣고 어느 편인지 확실히 노선을 정하라고 닦달을 한다. 피아(彼我 ; they & we) 구분을 명확히 해야 에너지가 덜 든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편 가르기를 물리학적 속성으로 들여다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힘의 세력이 극단으로 몰리면 다시 균형을 잡기 위한 반작용이 일어나는 것도 물리학의 세계이다. 지구촌 갈등이 곧 폭발하여 다시 융합할 시기가 도래할 날이 멀지 않은 것 아니냐는 불안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골치 아픈 정치, 경제 현장에서 벌어지는 당연과 당혹의 순간들은 묻어두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단편적인 생활 속에서 보이는 당연과 황당의 경계를 둘러봐도 부지기수로 많은 사례들을 볼 수 있다.

당장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만 해도 키우는 사람과 안 키우는 사람의 생각은 극단으로 나뉜다. 최근 여러 언론 매체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시장 경제가 육아시장을 곧 추월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 달 반려동물 양육비 80만 원, 반려견 유치원, 반려견 전용 TV 99만 원, 전국 동물병원 수가 소아과 병원보다 2배 많아, 반려동물호텔 1박에 6만 원, 개모차 판매, 유아용 유모차 앞질러"와 같은 내용이다. 물론 기사화하려니 극단적인 사례들을 나열했을 수 있으나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뭐 이런 황당한 일이 ㅠㅠ"정도로 보이는 내용이다. 하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아니 저런 참신한 아이디어가 있다니, 이용해 봐야겠는데" 정도의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연과 당혹의 경계를 이해해야 한다. 잘못된 것이 아니고 다름에 대한 받아들임이다. 이 당연과 당혹의 경계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기준만이 존재한다.


담배를 끊지 못해 아직도 피우는 사람이든,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는 사람이든, 밤새 모니터 속에 눈을 처박고 게임을 하든, 개인적 판단에 따른 소신과 행동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놔두면 된다. 다만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 타인의 범위는 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다. 가족도 포함된다. 아파트 베란다나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워서 위층 사는 주민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고, 술을 많이 마시고 꼬장 피우며 행패를 부리고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단순 명료한 경계다.


타인에 대한 선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것을 배려(配慮 ; consideration)라고 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라인에서 대형 애완견을 키우는 집이 있다. 가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면 애완견 산책을 시키느라 마주할 때가 있다. 애완견이 강아지일 때부터 봐왔다. 차우차우견인데 순한 녀석이다. 지금은 노견이 되어 걷기도 버거워하는 듯하다. 그런데 주인장께서는 엘리베이터에 누가 이미 타고 있으면 절대 애완견을 같이 태우지 않는다. 항상 먼저 내려가라고 하고 나중에 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신다. 아파트에서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이 다른 주민을 대하는 태도를 몸소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엘리베이터 밖에서 애완견이 오히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 꼬리를 치고 있어도 절대 같이 타지 않는다. 배려란 이런 것이다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주인장의 이런 배려의 모습이 쌓여 애완견에 대한 신뢰로 까지 이어진다. 애완견은 주인장을 닮는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똑같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교육과 훈련을 받느냐에 따라 성품이 달라진다. 후성유전학의 판박이다.


어떻게 볼 것이냐의 시선이 당연과 당혹의 순간을 결정한다. 당연히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선택은 하되, 선택되지 않은 쪽을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수도 있지, 정도로 넘어가야 한다. 현상의 개념성을 통해 받아들여 시선이 고정되지만 반대편도 고려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선의 높이가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여유를 가질 수 있다. 한쪽만 보는 외눈박이가 두 눈을 가진 사회로 오면 에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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