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Apr 03. 2024

퇴직자의 허세, 6개월치 점심약속

나이가 나이니만큼 주변에 정년퇴직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게 된다. 나도 곧 그 대열에 합류하겠지만 앞 선 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기꺼이 그 은퇴를 축하하지 못하고 있다. 아주 미묘한 심경임을 안다. 겹쳐있음도 안다. 곧 다시 경제 현장으로 나설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는 축하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안타까운 심경이 울컥하는 이유다.


산다는 것, 참으로 별거 아닌데, 이렇게 시간의 현장에 들어서게 되면 그 별거 아닌 것이 별것인 것이 되어버리는 현상. 참으로 묘하다. 그래서 홀아비 신세는 과부만이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의 은퇴도 마찬가지다. 많은 은퇴자들이 정년퇴직은 곧 뒷방 늙은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퇴직과 동시에 무기력에 빠지고 우울증에 시달린다. 일하는 곳, 직장의 場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지, 하는 일, 직업의 業까지 손 놓게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은 계속 옮겨갈 수 있고, 직업은 평생 내가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직장에서 퇴직했다고, 침울해할 것이 아니고 자신이 해온 평생 직업을 다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찾으면 된다. 직장과 직업을 헷갈리면 안 된다. 엉뚱한 착각에 빠져 우울해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 평생 해 온 직업이다. 잘했기에 평생 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가장 잘하는 '업'이다. '장'이 아니다. 직장은 나의 직업을 펼쳤던 공간일 뿐이다.


평생 하기 싫었는데 억지로 하다 보니 퇴직할 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그게 체질에 맞는 직업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랬으니 지금까지 버텨냈을 것이 틀림없다. 하기 싫고 꼴도 보기 싫었다면 아마 일찌감치 직업을 바꾸었거나, 안 그랬으면 화병이 나서 죽었을 확률이 더 클 것이다.

아무튼 어제도, 올해 직장에서 은퇴하신 한 분을 만났다. 우연히 점심시간에 길거리에서 만난 지라 커피숍에 들러 차라도 한잔 마실 시간이 애매하여 길에 서서 근황을 묻는다. 유명 기업에서 임원으로 퇴임을 하신지라 그 기세가 아직 정정하시다. "퇴직한 지 한 달 정도 됐는데 앞으로도 6개월 정도 점심식사 약속이 모두 잡혀있다. 지금도 점심 약속 때문에 가고 있는데 ---"라고 은근 자랑질이시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다니던 회사에 다니는 놈들 중에는 한 놈도 나랑 식사하자는 놈이 없네"라고 슬쩍 넋두리를 하신다.


"와우! 대단하십니다. 6개월치 점심 약속이라니, 퇴임 후 더 바쁘시겠습니다" "이제는 건강 챙기시는 일이 제일 중요한데 반주는 적당히 조금만 하세요"라고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서로의 갈길로 돌아섰다.


6개월치 점심약속.


물론 허세인 줄 익히 안다. 6개월 내내 점심약속이 잡혀 있을까? 언감생심일 거다. 이 6개월조차 당신의 약속이 꽉 차서 잡힌 일정이 아니고 상대방의 일정 중 비는 날짜를 잡다 보니 6개월 뒤에 잡혔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건 그렇고, 왜 평생 다니던 직장에 있는 선후배들은 그분께 식사 같이 하자고 아무도 연락을 안 하고 있을까?


딱 보면 안다. 회사일은 몸 바쳐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고 해서 임원 되고 퇴임할 때까지 버텨냈을 수 있으나 동료 선후배 관계에는 매몰찼을 것이라는 추론 말이다.


사람의 인품은 모든 장식을 벗어던지고 홀딱 벗고 마주 서봐야 안다. 대기업에 다녔네, 임원을 했네 등등 그 사람에게 씌워진 계급장은 퇴직과 동시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물론 우리 사회의 통념상 사회생활에서 부여된 직급의 마지막 계급장으로 호칭해 주는 게 예의이긴 하지만 그건 그저 예의적인 존칭일 뿐이다. 회장님, 사장님, 장관님, 국장님 등등 말이다.


퇴직과 동시에 마주한 현실은 모두가 똑같은 색깔의 죄수복을 입은 형국과 다름없다. 물론 그 속에는 힘센 놈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두 달 지나면 힘 빠지게 됨을 금방 눈치챈다. 권력을 행세하던 부류들이 전관예우에 목매는 이유다. 비즈니스 관계로 어떻게든 가까워지기 위해 접대도 하고 했던 사람들은 퇴직하는 순간, 끈 떨어진 연이 됨을 직감적으로 안다.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다. 


직장의 인연으로 엮인 사이는 그 정도의 관계일 뿐이다. 아쉬워하거나 미련을 가져서도 안된다. 일을 놓는 순간 대부분의 인간 관계도 거기까지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중에는 인간적으로 가까워져서 계속 연락하고 하는 부류들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가뭄에 콩 나듯 많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잘 챙겨야 한다.


6개월치 점심약속과 골프약속의 허세는 곧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6개월 이후가 문제다. 아마 예측 건데 그다음부터는 밥 먹자고 연락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혼자 식사해야 할 거다.


퇴직을 앞둔 사람들은 되돌아보라. 과연 나는 직장 선후배들이 기꺼이 점심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일상의 위대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