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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24. 2024

무엇을 어떻게 의식하며 살 것인가?

'깨어있다(awake)'라는 말은 뭘까?


단순히 잠에서 일어나 정신이 말똥말똥한 상태의 정도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생각의 범주에서 틀을 벗어나 다른 영역으로 사고를 넓힐 때도 깨어 있어야 한다고 표현한다. 깨어있음은 바로 의식이고 살아있음이고 자신(self)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의식(意識 ; consciousness)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의식'에 대해서는 인류가 최종적으로 알고자 하는 명제이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모르는 분야다. 물리학과 자연과학, 분자세포생물학 등 모든 학문을 통섭한 대가들만이 다시 인문학과 접목시켜 이제 겨우 접근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영역이다. 대가들조차 장님 코끼리다리 만지듯 할 수밖에 없는 '의식'의 영역을 귀동냥으로 들어보자.


우리는 "의식적으로 살아라" "개념 없이 무의식적으로 살지 마라"라는 소리를 수없이 듣고 산다. 그럼에도 무엇을 어떻게 사는 것이 의식적으로 사는 것인지조차 묻지 않고,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가름조차 할  없다.


의식작용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상태와 내용이다. 우주의 모든 것의 개념 출발은 상태의 수에 있다. 바로 엔트로피다. 의식도 이 우주의 근본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의식의 상태는 '나'라는 존재의 범위에 갇혀 있다. 나의 의식 상태에 대한 내용을 나는 아는데 타인은 전혀 알 수 없고 전달할 수 도 없다. "세계는 나의 상태"일 뿐이다.

예를 들어 지난밤 과음을 해서 배가 아프다고 치자. 배가 아픈 상태는 배를 움켜쥐고 얼굴 표정을 찡그려서 표현하여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아픈 정도의 내용까지는 전달할 방법이 없다. 상대가 저 정도 아프다고 하니 나의 과거 경험을 떠올려 그 정도 일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아픈 정도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정도인지, 수건 짜듯 뒤틀리는 정도인지 아픈 강도의 정도까지는 전달할 방법이 없다. 아픈 정도를 제스처나 언어로 표현을 할 수 있겠지만 정확히 같은 수준의 아픈 정도가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똑같이 전달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바로 의식은 경험인데 세상에 하나, 한번, 바로 시간에만 존재하는 only one이 인과적으로 연결된 것이기에 그렇다.


경험이라는 일화기억은 그 시간, 그 장소에, 그것도 나에게만 우주에서 벌어진 오직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도 인과적으로 연결된 경험이 말이다. 경험의 인과관계는 공리와 같다. 반드시 하나의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다시 원인의 시작이 되는 무한 반복 루프 속에 있다. 이 반복을 중단하기 위해서 조건을 걸어줘야 한다.  바로 환원불가능한 최대의 인과구조가 경험이고 의식인 것이다.


의미기억이 범주화되어 언어가 출현했다. 의미기억은 대부분 실제 상태가 없는 추상이다. 그러기에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경험의 다양성은 인류 존재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다층적이다. 방안에 햇빛 입자 하나 들어오면 바뀔 경우의 수가 10의 15승 이상 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볼일이다. 시선을 넓히는 일이고 세상을 보는 창을 더 내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김치와 한라산, 아말피를 들여다보고 건너가 볼 일이다. 지구 표층의 현상 속에서 생명이 뭐고 그중, 그 하나, 이 시간에 있는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알아채는 일이다. 그것을 의식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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