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왜 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걸까요? 피고 난 이후 농염한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타임랩스 카메라라도 설치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루종일 지켜보고 있어야 할까요? 꽃 피는 과정을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난 주말은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사무실에 와 있었습니다. "분명히 변화가 일어났을 텐데"라는 궁금증이 주말을 지배했고 "운동삼아 사무실에 나가볼까?"라는 유혹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다 조금 더 참아보기로 합니다. 궁금함이 배가되면 반가움도 더 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월요일 출근길을 재촉해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올라 사무실 출입보안카드를 찍고 백팩을 책상에 던져놓고 서둘러 창가로 향합니다.
음하하하~~ 역시나 난 화분에 꽃이 피었습니다.
지난주 내내 몽우리를 키워오다가 주말,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몽우리를 터트린 것입니다. 다섯 개의 몽우리 중에 아래로부터 3개는 완전히 개화를 했고 중간 것은 절반쯤 꽃잎을 열었고 맨 위에 몽우리는 아직 입을 닫고 있습니다.
꽃잎마다 자주색 줄무늬를 띄고 있습니다. 여름 초입, 창가로 들이닥치는 햇빛을 조절할 의향인 듯합니다. 이제 막 피어나서 그런가요? 아직 난향을 뿜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려 봅니다. 그래도 아직은 향의 정체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코가 건조해서 그럴까요? 코딱지를 후벼 파고 다시 들이대봅니다. 그럼에도 물리적 꽃향의 분자를 내놓지 않고 있는지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맨 위 봉우리가 잎을 가른 다음에야 은은한 자태를 뽐낼 모양입니다. 지금은 그저 그때를 위해 향을 모으고 있는 모양입니다. 감질나게 하나씩 하나씩만 보여주고 내놓습니다.
한 번에 확 봐버리야 속이 시원하겠지만 난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내놓아야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철저히 밀당을 하는 관계여야만 자기에게 물도 줄 것을 알아챈 듯합니다.
인간은 지구상 모든 생물의 최상위에 위치해 있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식물에 길들여진 종이기도 합니다. 탄수화물의 보고인 쌀과 밀, 보리 등 1년생 초본식물을 심고 거두고 잘 보관했다가 다시 다음 해에 뿌리고 거두고를 반복합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쌀과 보리를 에너지원으로 보면 한 줌의 쌀일 뿐이지만 쌀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충실한 노예가 없습니다. 뿌려주고 거둬주고 추울세라 저장해 주고 ~~~
생명의 연속성으로 보면 인간만큼 식물에 길들여진 종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에너지원이 되는 식물만 관리하고 나머지는 잡초로 치부해서 그렇지 ㅠㅠ
그렇다면 과일도 주지 않고 먹지도 못하는 난의 꽃을 기다리고 이유는 뭘까요? 고상한 취미일 수 도 있고, 자연을 차경하는 수준을 넘어 실내로 끌어들인 책임일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장 기본인 자연이 해야 할 비바람 햇빛 중에서 비를 차단시켜 놨으니 그 책임은 오롯이 사람이 져야 합니다. 그 책임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관심을 만듭니다. 이 책임을 다 할 수 없으면 실내로 생명을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반려견이 그렇고 반려식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질 수 없으면 차경으로 족해야 합니다. 실내로 들이지 말고 마당에 정원에 놔둬야 합니다. 비바람 자연의 시간에 동조하도록 놔두고 오롯이 지켜봐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의 생명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식물 하나, 화분 하나, 나무 하나, 잡초 하나 그리고 그 식물들을 오가는 벌과 나비조차도 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명은 어느 하나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이유가 되고 의미가 됩니다. 생명에 나 홀로 유아독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숨 쉬는 공기 속 산소조차 저 화분의 꽃들이 만들어낸 광합성의 결과물일진대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을까요? 저 화분의 꽃이 곧 내 생명의 시작이자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1800년대, 남미를 탐사하고 지구 생태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인류에게 제공했던 훔볼트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Alles ist wechselwirkung.)"라고 설파했습니다. 대가들의 시선이 지구적 관점의 크기였다면 난 화분의 꽃 핌에서 자연의 공진화를 찾는 일은 우리 같은 소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과 생명과 존재는 사무실 한 편의 화분 속에서 그 공진화의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장엄하고 귀한 현상을 목도하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