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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18. 2024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을 만난다는 것은

책을 읽다 보면 눈에 확 띄는 문장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일관된 주제로 끌고 오다 명쾌히 요약을 해주는 문장이나 키워드일 때가 있고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문장일 때도 있다. 눈물을 흐르게 하는 절묘한 감정의 계곡 묘사일 때도 있고 배꼽 잡을 웃음이나 은근한 미소의 순간을 잡아챈 문장일 때도 있다.


어느 경우든 눈길을 머물게 하고 문장을 떼어내 메모지에 박제시켜 놓게 하는 것은 바로 읽는 이의 감정 상태다. 어떤 때 어떤 문장을 만나느냐에 따라 같은 문장도 전혀 다른 뜻으로 다가온다. 문장이 갖는 현장성이자 해석성이다.


뇌과학자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은 '뇌가 나의 마음을 만든다(The emerging mind)'에서 예술의 10가지 보편원리를 제시했다. "피크점 이동(peak shift), 그룹 짓기(grouping), 대조, 격리(isolation), 지각적 문제 해결(perceptual problem solving), 대칭, 우연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에 대한 혐오, 반복, 리듬, 질서, 균형, 은유"다. 브레인이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을 설파한 것이다.


라마찬드란의 원리를 적용하면, 책을 읽을 때 눈에 띄는 문장은 은유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문장도 시각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지만 근본은 의미에 있다. 의미를 어떻게 강렬히 표현해 내느냐가 눈에 띌 수 있는 키포인트가 된다. 바로 비교와 대칭, 은유가 문장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경우다.


그래서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보이지 않음으로써 보이게 된다. 행간을 읽는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이면이 있는데 그것은 읽는 사람의 내면이 문장을 쓴 작가의 의도와 눈이 맞을 때 드러난다. 그때 문장이 번쩍 뇌리에 박힌다.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도끼로 내려찍듯 눈에 박히는 것보다 오히려 잔상이 오래 남는다.

'섬뜩한 아름다움'은' 불편한 진실'이다. 아름다움이 섬뜩할 리 없다. 라마찬드란의 미의 보편원리에 따르는 균형과 리듬과 질서가 있는 아름다움이 섬뜩할 수 없다. 아름다움은 부드러워 꺼리길 것이 없는 상태다. 그런 아름다움이 섬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뜩하다는 형용사를 붙인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초월한 궁극의 경지일 수 도 있다는 단서를 달고 등장한다. 너무 아름다워 소름이 끼치고 닭살이 돋는 그런 섬뜩함이라면 아름다움의 비상함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는 그런 조바심이다.


'차갑지 않은 추위' '외롭지 않은 쓸쓸함'과 같은 표현이거나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처럼 대칭을 써서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문장은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격정적인 대자보의 문구에서 피 끓는 청춘의 무모함을 아량으로 읽어낼 수 있고 마르틴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은 썩어 문드러진 구교에 철퇴를 날린 문장이 되었다.


글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바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꾸 읽고 많이 접해서 다양성과 만나야 한다. 그래야 그중에 한두 문장, 한 두 단어 걸려드는 것이다. 그것도 관심을 가졌을 때만 그렇다. 아무 생각 없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 나에게 어떤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는다.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이고 눈앞을 지나치는 안개일 뿐이다. 문장 속에서 의미를 읽어내고 잡아채 나의 의식 속으로 끌어들일 때 그 문장만이 살아있게 된다. 산다는 것은 무한대의 확률 속에서 나만의 존재 확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똑같을 수 없는 독창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그 개성을 얼마나 잘 가꾸고 유지하고 키워나가느냐가 자기의 존재와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삶에 대나무 마디처럼 중간중간 쉼이 있고 경계가 있어야 인생이 굵어지고 높아질 수 있다. 그 대나무 마디 하나하나가 문장 하나, 키워드 하나다. 내 삶의 대나무 굵기와 키는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고 만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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