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TV가 없는 집 있을까요?
저처럼 60대를 바라보는 꼰대세대들에게는 거실에 당연히 TV 한대쯤은 놓여있어야 했습니다. 70년대만 해도 집에 TV는 흑백 가전이었을지언정, 가보 중 하나였고 자랑거리였습니다. 오죽하면 브라운관을 가리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니까요.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면 우습게 보이는 현상들이, 당시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세월이 지나오면서도 거실 TV는 최신형으로, 그리고 크기가 점점 커지는 쪽으로 진화를 했고 거실의 분위기와 집안의 위세를 보여주는 대표 가전으로 자리 잡기까지 했습니다. 아직까지도 대부분 가정의 거실에서 TV의 역할은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거실에서 TV가 슬슬 퇴출되는 분위기인 듯합니다. 저만해도 아직은 TV를 끼고 사는 입장이긴 합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도, TV 혼자 웅얼웅얼 떠들며 거실을 지켜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제 가까운 조카 집에는 아예 TV가 거실에 없습니다. 그 집에는 아예 다른 방에도 TV가 없습니다. TV 대신 벽면 전체를 책꽂이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거실에서 TV를 없애는 분위기는 아이를 키우는 젊은 세대 가정에서 많이 볼 수 있답니다. 지금은 중고등학생이 된 조카 손주들이 둘이나 있는데, 커가면서 TV를 보는 대신 책을 손에 쥐어주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편이었답니다. 하지만 요즘 크는 아이들이 현란한 동영상을 안 보면 아이들끼리의 대화에서 소외될 수 도 있었을 텐데, 그런 동영상은 휴대폰을 시간제한으로 보게 했답니다.
그렇게까지 TV와의 거리를 둠으로 해서 아이들 정서가 좀 더 밝아지고 안정되며 창의성이 더 좋아졌을까요? 글쎄요 좋아질 거라는 바람이 강력히 작용하기에, TV 오락물 시청에 눈을 빼앗긴 아이들 보다는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좀 더 좋을 것이라는 확증편향밖에는 들이댈 게 없긴 합니다. 하지만 조카들을 관찰해 봐도 다양한 취미거리와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음은 눈치챌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가정마다, 자식을 키우는 가치관이 다르고 자신의 관념과 관점을 정의하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에, 거실 TV 존재에 대해 보이는 다양성의 단면일 것입니다.
그래도 휴일 집에 있을 때면 카우치 맨으로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이리저리 누르고 있는 군상 중 한 명에 속하지만, 보는 채널이 대여섯 개 정도 정해져 있음도 알게 됩니다. 대부분 가정이 그렇듯이 요즘 TV를 통해 볼 수 있는 채널들이 쇼핑 채널을 포함하여 대략 100개 가까이 됩니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정말 별별 채널이 다 있습니다. 그 많은 채널 중에 고정되어 보는 게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나마 집에서 무의식적으로 TV를 켜는 유일한 존재가 저뿐입니다. 대학교 4학년인 막내 녀석은 아예 TV를 안 봅니다. 물론 거실 TV를 안 볼뿐 휴대폰을 끼고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농구경기 영상을 주로 보더군요. 영상을 시청하는 채널이 다를 뿐입니다. 와이프도 좋아하는 드라마 정도나 볼뿐 TV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실 TV를 켜고 끄고 사람도 접니다. 시청권은 거의 제가 독점하고 있는 꼴입니다.
온 가족이 TV를 함께 보는 경우는 이제 올림픽이나 월드컵 시즌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어떤 방편이 더 좋은 건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좋고 나쁨의 차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시청각 방편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게 되는 편향에 빠지는 오류의 역작용도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한 곳에 매몰되는 현상을 줄이고자 하나를 없앴더니 다른 쪽에 빠져 다른 편향이 또 발생하는 현상 말입니다.
인간이란 참 오묘하여 계속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 계곡물과 같이 편향을 찾아갑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그러함을 아는 순간, 다양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럴 수 도 있음을 아는 순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지고 살아내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즐거워하고 울고 웃기도 하다가 그것이 세상사는 모든 총합임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보니 별거 아닌 걸 알게 됩니다. TV가 혼자 떠들고 있는 것도, 근육의 힘을 써서 지구를 걷는 행위조차도 내가 선택한 확률의 하나였음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