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거슬러 중. 고등학교 학창 시절, 나는 꽤 모범생이었다. 국. 영. 수. 사회. 과학 그리고 체육 까지. 대부분의 과목에서 무난히 점수를 잘 받곤 했다. 다만, 유독 타고난 재능이 있는 친구들보다 눈에 띄게 뒤쳐진 과목이 있었는데, 그 과목은 바로 미술이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난 타고난 곰손이다. 같은 반 미술 전공을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나와는 반대로, 다른 과목들은 하위권 바닥을 기어 다녔지만, 미술 시간만큼은 빛이 낫다. 김홍도의 환생인 양 재능을 마음껏 펼쳤는데,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도구를 사용해 그림을 어찌나 멋지게 잘 그리던지, 저런 친구가 바로 위인전에 나오는 천재인 것인가 라는 생각을 들게 한 친구였다.
'너는 어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니? 정말 대단하다.' 감탄이 섞인 칭찬을 하면, 그 친구는 쿨하게 으쓱하며, '나는 미술 전공이잖아. 당연히 잘해야지 ~~ 너는 대신 국. 영. 수를 잘하잖니.'라고 대답해주곤 했다. 어쨌든 타고난 곰손인 탓에, 취미 생활로도 유화. 아크릴 그림 그리기, 혹은 꽃꽂이 등 손솜씨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성인이 되어서도 멀리 하곤 했다.
지금 살고 있는 포르투갈엔 세라믹 공방들이 많은데, 리스본에 사는 나의 한국 친구는 공방을 다니며 직접 손으로 컵, 접시, 그릇들을 멋지게 빚어내곤 했다. 어느 날 친구가 너도 한번 나랑 공방에서 도자기를 한번 같이 굽지 않을래? 라고 권유를 했는데, 단칼에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호기심은 왕성하기에 해보지도 않고 거절한 것은 아니다. 이미 예전에 한번 해보아서 나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한 시간에 30유로, 가마에 굽는 것까지 하면 3번의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90유로를 써가며 곰손으로 빚어낸 그릇을 갖느니 그 돈으로 그냥 접시 여러 개를 사는 게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시절 도예를 전공하는 소꿉친구가 졸업 전시를 준비할 때, 그녀의 대학교에 한번 찾아가 친구 곁에서 나도 한번 흙으로 무언가를 빚어내려고 노력을 한 적이 있다. 곰손으로 시도하기 가장 쉬운 것이 컵이라고 하기에, 나는 작은 소주 컵을 옆에서 빚어냈었다. 소주 컵이라고 하기엔 다소 두껍고 투박하고 어딘가 어설픈 게 못생긴 작은 컵이 완성이 되었다. 그걸 아빠에게 선물로 드렸다. 딸내미가 만들었다고 하면, 감동을 받으며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빠는 소주컵은 소주회사에서 만든 유리잔에 먹어야 맛있다며, 단칼에 내 선물을 손사래 치며 거절을 하셨다.
곰손이라 예쁘게 만드는 재주는 없지만, 그걸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도 나에겐 즐겁지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꼼지락 거리자니 좀이 쑤셨었다.
서론이 길었는데 곰손 자기소개서 정도라 하자. 작년 6년간을 몸담아 왔던 회사의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직장 동료에게서 '크레파스 봉봉'이라는 크레파스를 선물로 받았다. 크레파스와 그림 그리기 팁이 담긴 교본이 담겨 있었다.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매사에 긍정적인 친구였는데, 선물을 주기 며칠 전부터 나를 위해 '크레용'을 준비했다며 예고를 날렸다. 손사래를 치며 '아이고 나 곰손이야.. 그런 거 주지 마 ~~'라고 했더니 초긍정적인 이 친구는 곰손도 쉽게 할 수 있다며, 힐링을 하는데 이만한 게 없다고 했다. 유튜브 튜토리얼도 있다며, 그걸 보면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며.
그녀가 준 퇴사 선물이니 고맙게 받았다. 백수가 되면 자유시간이 넘칠 테니, 그리고 퇴사 후 유럽으로 이주를 할 예정이었기에, '그래 유럽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 번쯤은 그려 보지 뭐'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재주는 없기에 지난 1년 동안 2번 정도 이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정말 그 친구의 말대로 곰손도 스윽스윽 여러 가지 색을 교차하며 칠해주면, 내가 아닌 다른 솜씨 좋은 누군가가 그린 것처럼 꽤 그럴듯한 그림들이 완성되었다.
부드럽게 종이 위에 미끄러지는 크레용의 발림성도 경쾌하니 즐거웠다. 특히 진한 색을 먼저 칠한 후 연한 색을 덧칠하는 이 순서가 중요하다. 연한 색을 먼저 칠하고 진한 색을 칠하면 그 두 가지 색의 경계가 뚜렷하여, 그냥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같이 보이지만, 진한 색을 먼저 바르고 연한 색을 그 위에 살짝 겹치게 칠해주면 두 가지 색이 자연스럽게 블랜딩 되며,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것 같은 흐뭇한 결과가 쉽게 연출된다.
근래 선물이라고 하면 실용적이고 쉽게 주고 받기 좋은 건 화장품이었다. 핸드크림, 핸드 솝, 립스틱, 립글로스, 캔들, 향수 등등. 성인이 되어 선물로 받은 크레용은 받을 때는 다소 낯설고 생소했는데, 막상 손에 크레용을 잡고 내가 맘에 드는 색을 골라가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동료가 의도했던 것처럼 내 마음과 머릿속이 정화됨을 느낀다. 성인이 되어 다시 손에 쥐어보는 크레파스, 그 순간만큼은 사라졌다고 생각되었던 나의 동심이 다시 찾아와 내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