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5
회사 물건을 정리했다. 커다란 박스를 채운 것은 대부분 책이랑 각종 약, 컵 3종. 작업했던 파일들도 한번 훑어보는데 편집자라는 직업 특성상 포트폴리오를 만들거나 제작 사양을 참고할 때나 다시 열어볼 정도지 어디에 사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책들은 이미 나왔고, 프로모션도 대강 마무리해두었으니 이제 회사에서 관리만 잘해주면 된다.
짐을 싸기는 싸는데 막상 이것들을 가져가서 어디에 쓰나 싶다. 컵, 발 난로, 스탠드를 제외하면 대개 가져오나 마나 한 것들이다. 그간의 회사 생활이 의미 없는 박스 두 개로 마무리되다니, 약간 허무하기도 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짐들을 가져오더라도 집에서 한번 들춰볼 일 없는 것들이라면 그간 내가 일한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아주 다행히도 나는 지하철에서 내리기 전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나.
그간 작업한 모든 이력은 내 머릿속에 촘촘이 박혀 있었다. 이젠 종이를 보기만 해도 그 종이 이름이 뭔지, 만지기만 해도 그 종이가 몇 그램인지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다. 이 아이템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켜야 할지 외에도 책 크기나 제작 사양, 발간 시기 같은 것은 기계적으로 휘리릭 정한다. 척 하면 딱 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런 내게 지금껏 작업한 자료가 필요할까?
제작 사양을 참고하거나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는 물론 필요하겠지. 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세세한 부분이야 어떻게든 알음알음 알아낼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작업 중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며, 어떤 식으로 작업하면 지름길이라는 것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아니 엉망진창이나마 서랍 속에 쑤셔 넣어져 있다는 점이다. 뭐, 다시는 책을 안 만들 거지만 그래도 이런 능력을 가졌다니, 쓸데없어서 왠지 더 멋있다. 하하하하.
예전에 한 대학생 무리가 수업 과제로 ‘편집자’를 인터뷰하러 왔는데 나에게 책 만드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당연히 멋진 대답은 하지 못했다. 책을 만드는 일이 멋질 것까지는 무엇인가. 작가를 발굴하고, 이미 작가가 된 분들에게는 전작보다 더 멋진 책을 만들도록 도와주고, 독자에게 재미있는 콘텐츠를 제공해주는 것. 이 세 가지면 되는 것을. 하지만 주관적으로 나는 내 직업적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책을 만들지 않는 순간이 오더라도, 조카가 “이모는 무슨 일을 했던 사람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는 것.
“이모는 책을 만들었던 사람이란다.”
졸 멋있잖아?
그래. 이모는 책을 만들던 사람이었단다. 그리고 책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물리적인 것도 필요가 없지. 일단은 이것으로 만족한다. 박스 두 개는 사실 어찌돼도 상관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