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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Mar 12. 2018

가족 간의 적당한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거듭 말하지만 나는 올해로 자취 경력 1n년째이다. 스무 살, 대학 때문에 언니와 서울에 올라왔는데 그 이후로 쭉 밖에서 살고 있다. 고향집은 이제 ‘내 집’이 아닌 ‘본가’가 되었으며 가족이라 하더라도 사전에 약속을 잡고 만난다. 1n년 전에는 내가 이렇게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 주변에도 자취를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때로 그 사람들과 모여 자취 생활의 애로사항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예를 들면 집 어딘가가 고장났는데 집주인이 연락을 안 받는다든가, 계약이 끝났는데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골머리를 썩고 있다든가, 하다못해 매일 저녁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등을 이야기하다 보면 세상에, 혼자 사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다(하지만 이들은 모두 혼자가 좋아 여직 이렇게 살고 있으니 다들 말만 그런 거다. 세상사 원래 그렇지 않나. 나쁜 일이란 오래가지는 않지만 임팩트가 큰 법).



그런데, 이렇게 말 잘 통하는 사람들과도 가끔 ‘음?’ 하는 의문이 생기는 때가 있다. 바로 가족 이야기를 할 때. A양은 혼자 나와 사는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제대로 된 청소기를 사지 못하게 한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어차피 시집가면 그때 좋은 것을 살 테니 지금 가지고 있는 핸디 청소기로 만족하라고 했다고. B양은 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은데 부모님의 반대로 시기를 놓친 것이 한이라고 했고, 부모님 때문에 해외여행을 못 가거나, 전세 계약이 끝나면 부모님이 집을 알아봐주러 시골에서 올라온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네가 먼저 하고 통보하면 되잖아?”라고 말하지만 그녀들에게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집을 떠나온 지 10년이 넘은 터라 웬만한 건 내 선에서 해결한다. 이사를 가야 할 것 같으면 부모님에게는 대부분의 것들을 확정짓고 약 한 달 전에 말하곤 했는데, 이번 이사 때도 그렇게 이야기하니 환갑을 맞은 어머니가 “이삿날 가서 좀 도와줄까?”라고 하기에 다음부터는 이사 가고 일주일쯤 후에나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사 문제도 이렇게 처리할 이 정도이니 직장 문제나 남자친구 이야기 같은 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내가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무조건 한다. 그리고 다 정리한 후 부모님이 이제 안심하겠다 싶은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말한다.



가족끼리 너무 삭막한 거 아니냐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분명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집을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 부모님은 그야말로 걱정이 몸에 밴 분들이다. 내가 이사를 가야겠다며 예산과 조건을 이야기하면 “그런 집이 있을까?” 하면서 눈썹으로 ‘여덟 팔’자를 그리고, 다음 세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보증금을 못 돌려준다는 집주인의 말을 전하면 새로운 세입자가 정해졌다는 소식이 들릴 때까지 안정된 생활을 못 한다. 작년 일본 여행 때는 언니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가 간신히 찾았는데(발목만 담글 수 있는 온천물에 빠져 있었다) 휴대전화를 찾은 이후에도 엄마는 저녁을 못 먹었다.



집에서 살 때야 내 일거수일투족을 부모님이 알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독립해서까지 내 일로 부모님이 골머리를 썩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언제인가부터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통보하는 습관이 생겼다.



불효자 같은 소리라고?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반전은, 내가 이렇게 행동하니 부모님이 자신들의 삶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 몇 년은 서운해했다. 그런 큰일이 있는데 왜 얘기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모든 것을 해결한 후 마치 무용담처럼 좋은 소식만 전하니 부모님도 전전긍긍하는 일 없이 마음 편히 살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지뢰밭(자식이 셋이니 오늘은 또 무슨 일이 터지려나 지뢰밭이었을 수밖에)에서 노심초사하며 살다가 평온한 해변에 떨어진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런 일이 거듭되자 부모님은 나를 어른으로 대해주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자식들이 어떻게 지내든 말든 본인들 스케줄에 따라 여행을 다닌다. 가깝게는 장단 콩 축제부터 시작해 멀리는 외가 식구들과 함께 유럽 여행까지. 어느 날은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아주 한참 뒤에 해외라는 답을 받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좋기도 하지만 기분이 묘하다. 아니, 해외에 나가는데 일부러 딸에게 연락을 안 하는 건 뭔가! 내가 하는 것처럼 사건 종료 후에 통보하려 했던 걸까.



가족끼리라도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자신의 삶이 없다. 그간 내가 부모님 옆에 딱 달라붙어 살았던 탓에 부모님에게는 사생활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멀어진 만큼, 부모님의 삶에도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새로 돋아나기 시작한 새싹들에는 적어도 나의 좋은 소식만 들려주고 싶다. 나의 희로애락을 모두 보여주지 말고 정말 좋은 소식들만. 그리고 꼬리를 이어 든 생각은, 내가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족의 행복이 아닌 나 자신의 행복을 빈다. 내게 큰일이 없어야 부모님에게도 큰 걱정이 없을 테니. 무슨 큰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 상황이 모두 종료된 후에야 이야기하겠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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