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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Apr 16. 2018

벗어놓은 양말의 냄새를 맡는 직업




에디터 시절의 모습이 궁금하다는 이야기를 들어 옛날에 썼던 글 중 하나를 올립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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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에디터로 일한 지 꼭 8년이 되었다. 출판인이란 워낙에 소규모, 폐쇄적 집단이다 보니 어디 가서 “책 만들어요”라고 하면 약간의 관심을 받는다. 그리고 에디터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지난 8년간 무수하게 들어왔기에 이제는 그냥 정형화된 한 줄을 답을 말한다.



“PD랑 똑같아요. 기획, 섭외, 편집, 마지막 홍보까지 책 한 권이 나오는 프로세스 전체를 조율합니다.”



훗. 이렇게 말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지곤 했다. ‘내 직업에 대해 내가 생각해도 참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했군’ 뭐 이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 유명한 명언처럼 이러한 자뻑의 시간 또한 곧 지나가고 말았다. 반년 전, 대학생들이 과제 차 에디터라는 직업에 대해 인터뷰하러 온 적이 있는데 “에디터란 어떤 일을 하나요?”라는 질문에 문학팀 차장님이 이렇게 답했다.



“PD랑 똑같아요. 기획, 섭외, 편집, 마지막 홍보까지 책 한 권이 나오는 프로세스 전체를 조율합니다.”



세상에. 내가 먼저 답했으면 차장님도 속으로 놀랐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창의적이라 생각했던 답은 이미 그 차장님이 몇 년 전부터 우리고 또 우려 마시다가 이제는 맹물 맛밖에 안 나는, 너덜너덜해진 티백 같은 답이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 창의력을 쑥쑥 높여준다는 눈높이 교육은 이렇게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에디터라는 직업적 본질에 대해 사전에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은 사람이 내 머릿속에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대답을 해내는 것을 보고 ‘아, 그래도 저것이 우리 직업 소개의 FM이긴 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의 대답은 우리 직업을 소개하는 FM적인 답변이지 우리 직업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지는 못한다. 예를 들면 ‘라면이란 인스턴트식품으로 튀긴 면과 수프가 한 봉지에 들어 있고 나트륨 함량이 매우 높은, 몸에 안 좋은 음식’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술 마신 다음 날에는 절대적으로 섭취해야 한다’라는 설명을 빼먹으면 섭섭할 정도의 요리가 아닌가.



소설을 쓰지 않을 때는 에세이를 쓰거나 번역을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인 자신의 본업을 ‘맥주 회사’에, 에세이를 쓰는 일에 대해서는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에 비유했다. 세상에는 맥주를 못 마셔 우롱차만 마시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 외에도 그는 제3의 음료를 제조하곤 하는데 그 음료의 이름은 바로 ‘번역’이다. 그가 한 인터뷰 중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이 있다. 인터뷰이가 물었다.



"번역을 마치신 뒤에 출간된 책을 읽어보시나요?"



하루키는 그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마치 벗어놓은 양말의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요.”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내 직업의 본질이구나. 나의 직업은 벗어놓은 양말의 냄새를 맡는 일이다. 저자가 탈고한 양말을 발에 끼워서 어디 터진 데는 없나 요리조리 돌려보고, 누구에게나 사이즈도 잘 맞고 어울리는지 확인한다. 그러다 보면 원고가 점점 숙성되어가는데, 독자에게 전달되어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숙성되었는지 마지막까지 냄새를 맡는다.



그뿐 아니다. 새 원고뿐 아니라 인쇄되어 10년째 팔고 있는 양말 냄새도 맡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양말의 냄새도 맡는다. 이 양말 저 양말 신어보는 중간중간 전임자가 만들어두고 간 양말들 표지 갈이도 하고, 사회 이슈에 맞춰 이전 양말 광고도 집행하고, 수출용 자료도 만든다. 이렇게 양말들 냄새를 맡고 있는 사이 갑자기 절판시킬 양말 리스트를 만들라든가(회사 설립 이후 20년간 만들어진 양말의 전체 리스트를 참조해야 했다), 이것들의 손익 리스트를 작성하라든가, 이 양말들의 기획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등 히스토리를 작성하라는 명이 떨어지면 아니 양말이 그냥 양말이지 다 나온 양말들의 기획 배경이 이제 와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양말 공장의 힘없는 직원은 회사 그룹웨어에 들어가 열심히 열심히 그것을 작성한다. 양말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구석구석 냄새를 맡는다.



생각해보면 이 ‘양말’이라는 비유 역시 탁월하다. ‘벗어놓은 속옷의 냄새를 맡는 작업’이라면 저자와의 관계가 너무 이상해질 것 같다. 또, 원고란 역시 저자의 깊은 속내에서 작성되는 것이므로 겉옷과의 비유에는 어울리지 않고, 모든 치부를 드러내지도 않기에 속옷에 비유되기에도 적절치 않다. 적당히 자기검열을 거쳐 나온 진심,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 이것들을 담아내기에 양말만 한 비유가 또 있을까.



지금까지 이렇게 얘기해놓고 보니 내가 에디터인지 양말 장수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이 비유를 이어나가자면 시간이 지나도 향기가 나는 양말이 있다. 다행히 지금껏 내가 만든 양말들에서는 좋은 향이 났고 다양한 매체에서 이 양말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베스트 양말’이 될 정도로 많은 판매율을 자랑한 상품도 있고, 어느 정도 상승 곡선을 타다가 안타깝게 큰 빛을 보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그 양말을 만든 사람들이 그것들을 발판 삼아 이리저리 곁가지를 뻗어나가는 모습을 보면 참 기분이 좋다. 그래, 일본에서 제일가는 우롱차를 목표로 하겠다는 하루키 씨처럼 나도 한국에서 제일가는 양말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어쩌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양말 이야기로 가득 찬 글이 되어버렸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에디터고 이 일을 8년째 하고 있다. 이 글의 요지가 헷갈리신다면 이건 다 하루키 씨 탓입니다. 하루키 씨를 탓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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