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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기소가 있습니다만

by 졸쪼

새해맞이 청소를 했다. 겨울치고는 춥지 않은 날씨라 창문을 화알짝 열고 천천히 오래오래 이곳저곳에 청소기를 들이밀었다. 이렇게 연말 같지 않은 연말, 연초 같지 않은 연초는 3n년 동안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싱크대 배수구도 닦고 손걸레도 꼭 짜서 묵은 먼지들을 좀 벗겨냈더니 이제야 새해 느낌이 좀 난다.


기지개를 한번 쭉 켜고 묵혀놨던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 마음이 찝찝하다. 유일하게 청소기를 구석구석 대지 못한 곳에 자꾸 눈길이 간다. 바로 TV 테이블 밑이다.


TV 아래 빈 공간에는 책들이 쌓여 있다. 멀쩡한 책장 놔두고 왜 이런 곳에 책을 쌓아놨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제가 왜 이런 인간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집에는 몇 가지 규칙들이 있어서요;; TV 아래 공간은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을 넣어두는 곳, 말하자면 책 대기소이다. 그냥 책장에 넣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으신다면 네, 저희 집에는 몇 가지 규칙들이 있어서요ㅠㅠ


우리 집에서 책장은 감히 검증받지 못한 책들이 범접할 수 없는 곳이다. 편집자답지 않게 집 거실에는 이케아에서 2만 얼마를 주고 산 흰색 3단 책장이 딱 하나 있는데, 그나마도 이 책장 두 칸에만 책을 넣는 것을 규칙으로 두고 있다. 그러니 기존에 넣어둔 책들로도 이미 만원인 이곳에 아무 책이나 꽂는 행위는 동네축구 주전도 못 뛰어본 선수를 월드컵 8강전 주전에 끼워 넣은 꼴이다.


이런 귀찮은 규칙을 만든 것은 몇 년 전. 책을 좋아해서 편집자가 되었는데 오히려 책에 짓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일을 오래하려면 더는 책에 짓눌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 큰마음 먹고 책장 두 칸만 남기고 싹 정리해버렸다. 선정 기준은 그때그때 다른데 기본은 ‘10년 뒤에도 읽고 싶은 책’. 물론 10년 뒤에는 안 읽을 것 같지만 일단은 느낌이 좋으니 두고 있는 것도 있고, 언젠가 어울리는 사람이 생기면 선물하려고 몇 권이나 사놓은 책도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책이 부전승으로 올라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덕분에 이 책장에는 일주일 전에 산 책부터 중학교 때 시청에서 주최한 ‘아나바나운동’ 때 산 소설까지 다양한 책들이 살 부비며 모여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분야 설정이나 줄 맞추기는 꿈도 못 꾼다. 무언가 발췌·참고할 글을 찾아야 한다거나 제목·표지 카피를 참조하기도 많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내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책을 대하는 마음이 훨씬 가뿐해졌고 집 공간도 더 넓어졌으므로.


아이러니한 점은 이 시스템을 도입한 후로 독서량이 현저히 늘었다는 것이다. 요즘 나의 책 사는 패턴은 이렇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 같은 책이 세 권 이상 쌓이면 온라인 대형서점에 판다. 현금보다는 포인트로 받는다. ‘포인트로 받기’를 선택하면 현금으로 받을 때보다 보통 적립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고 싶은 책이 생길 때마다 포인트로 결제한다.


책장 공간도 넓어지고, 새 책을 공짜로 얻을 수 있으며, 가끔 로그인했을 때 포인트를 보는 든든함은 덤이다. 이 포인트가 있는 한 보고 싶은 책이 생기면 언제든 클릭 몇 번에 그 책을 가질 수 있으므로. 최고로 많을 때는 20만 원 정도가 쌓여 있었는데, 온종일 싱글거리며 온라인 서점을 돌아다닌 날도 있었다. ‘가지지 않았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책 대기소를 만든 덕에 서점 안에 있는 책들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얼마 전 나에게 염세주의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준 아티스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리터> 인터뷰 중 일부였는데 그는 책을 험하게 보는 편이라고 했다. 책 귀퉁이를 접고, 줄도 치고, 가방 속에 이리저리 굴린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 ‘이번 여행에는 이걸 읽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책을 들고 어딘가에 가면, 그 책을 다 읽은 뒤 호텔 등에 그 책을 두고 온다고 했다. 그리고 또 읽고 싶어지면 다시 구매한다고. 책을 좋아하지만 책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라니.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멋진 독서 습관이다.


무언가에 짓눌리고 있다면 그것이 내 삶의 중심에 있든 아니든 한번 싹 정리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걸 어떻게 버려요”라고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한번 해보면 생각 외로 후련하고 집도 깔끔해진다니까요? 비록 책 대기소에는 청소기를 들이대지 못해 찝찝해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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