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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Jan 02. 2018

책 대기소가 있습니다만

새해맞이 청소를 했다겨울치고는 춥지 않은 날씨라 창문을 화알짝 열고 천천히 오래오래 이곳저곳에 청소기를 들이밀었다이렇게 연말 같지 않은 연말연초 같지 않은 연초는 3n년 동안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싱크대 배수구도 닦고 손걸레도 꼭 짜서 묵은 먼지들을 좀 벗겨냈더니 이제야 새해 느낌이 좀 난다.
  

기지개를 한번 쭉 켜고 묵혀놨던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그런데 영 마음이 찝찝하다유일하게 청소기를 구석구석 대지 못한 곳에 자꾸 눈길이 간다바로 TV 테이블 밑이다.
  

TV 아래 빈 공간에는 책들이 쌓여 있다멀쩡한 책장 놔두고 왜 이런 곳에 책을 쌓아놨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제가 왜 이런 인간이 됐는지 모르겠지만저희 집에는 몇 가지 규칙들이 있어서요;; TV 아래 공간은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을 넣어두는 곳말하자면 책 대기소이다그냥 책장에 넣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으신다면 네저희 집에는 몇 가지 규칙들이 있어서요ㅠㅠ
  

우리 집에서 책장은 감히 검증받지 못한 책들이 범접할 수 없는 곳이다편집자답지 않게 집 거실에는 이케아에서 2만 얼마를 주고 산 흰색 3단 책장이 딱 하나 있는데그나마도 이 책장 두 칸에만 책을 넣는 것을 규칙으로 두고 있다그러니 기존에 넣어둔 책들로도 이미 만원인 이곳에 아무 책이나 꽂는 행위는 동네축구 주전도 못 뛰어본 선수를 월드컵 8강전 주전에 끼워 넣은 꼴이다.
  

이런 귀찮은 규칙을 만든 것은 몇 년 전책을 좋아해서 편집자가 되었는데 오히려 책에 짓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이 일을 오래하려면 더는 책에 짓눌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 큰마음 먹고 책장 두 칸만 남기고 싹 정리해버렸다선정 기준은 그때그때 다른데 기본은 ‘10년 뒤에도 읽고 싶은 책’. 물론 10년 뒤에는 안 읽을 것 같지만 일단은 느낌이 좋으니 두고 있는 것도 있고언젠가 어울리는 사람이 생기면 선물하려고 몇 권이나 사놓은 책도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책이 부전승으로 올라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덕분에 이 책장에는 일주일 전에 산 책부터 중학교 때 시청에서 주최한 아나바나운동’ 때 산 소설까지 다양한 책들이 살 부비며 모여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분야 설정이나 줄 맞추기는 꿈도 못 꾼다무언가 발췌·참고할 글을 찾아야 한다거나 제목·표지 카피를 참조하기도 많이 불편해졌다하지만 내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책을 대하는 마음이 훨씬 가뿐해졌고 집 공간도 더 넓어졌으므로.
  

아이러니한 점은 이 시스템을 도입한 후로 독서량이 현저히 늘었다는 것이다요즘 나의 책 사는 패턴은 이렇다다시는 보지 않을 것 같은 책이 세 권 이상 쌓이면 온라인 대형서점에 판다현금보다는 포인트로 받는다. ‘포인트로 받기를 선택하면 현금으로 받을 때보다 보통 적립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그리고 보고 싶은 책이 생길 때마다 포인트로 결제한다.
  

책장 공간도 넓어지고새 책을 공짜로 얻을 수 있으며가끔 로그인했을 때 포인트를 보는 든든함은 덤이다이 포인트가 있는 한 보고 싶은 책이 생기면 언제든 클릭 몇 번에 그 책을 가질 수 있으므로최고로 많을 때는 20만 원 정도가 쌓여 있었는데온종일 싱글거리며 온라인 서점을 돌아다닌 날도 있었다. ‘가지지 않았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책 대기소를 만든 덕에 서점 안에 있는 책들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얼마 전 나에게 염세주의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준 아티스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리터인터뷰 중 일부였는데 그는 책을 험하게 보는 편이라고 했다책 귀퉁이를 접고줄도 치고가방 속에 이리저리 굴린다고 했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 ‘이번 여행에는 이걸 읽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책을 들고 어딘가에 가면그 책을 다 읽은 뒤 호텔 등에 그 책을 두고 온다고 했다그리고 또 읽고 싶어지면 다시 구매한다고책을 좋아하지만 책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라니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멋진 독서 습관이다.
  

무언가에 짓눌리고 있다면 그것이 내 삶의 중심에 있든 아니든 한번 싹 정리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걸 어떻게 버려요라고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한번 해보면 생각 외로 후련하고 집도 깔끔해진다니까요비록 책 대기소에는 청소기를 들이대지 못해 찝찝해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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