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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나 Oct 09. 2023

알프스 산맥의 공기 마시기

2. 베르니나 특급열차

여행을 계획하다 우연히 마음을 홀딱 빼앗긴 사진 한 장이 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눈 내린 알프스 산맥,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는 빨간 기차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실제로 저 빨간 기차를 타면 얼마나 좋을까. 열심히 검색에 돌입했고, 곧 Bernina Express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시그니처인 새빨간 외관을 자랑하며 알프스 산맥을 끼고 이태리와 스위스를 횡단하는 관광열차였다.


직접 티켓을 구매해 열차를 타러 갈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열차 탑승과 주변 관광을 함께할 수 있는 투어를 신청하기로 한다. 수많은 옵션 가운데 꼬모호수 주변 마을 바레나에서 출발해 열차를 타고 이태리와 접경지대에 위치한 스위스의 마을에 들렀다 밀라노에서 투어를 마무리하는 상품이 있었다. 다음 목적지를 밀라노로 정한 우리의 일정에 안성맞춤이었다.


대망의 투어 당일이 되었다. 먹구름이 하루종일 드리웠던 전날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호수 건너편이 시원하게 보일만큼 하늘이 맑아져 있었다. 경치 감상에 더없이 좋은 날씨에 우리는 기분이 이미 한껏 좋아진 상태로 바레나로 가는 수상택시를 탔다. 아직은 차가운 아침 공기에 온기를 살짝 더해주는 햇살, 보트가 물살을 가로지르며 만드는 바람을 온몸으로 시원하게 맞는 느낌을 즐기고 있으니 택시는 곧 바레나에 도착했다.

중세도시 바레나는 벽돌로 지어진 시계탑이 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투어 집결지인 광장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아직 남아있는 성곽의 흔적이 호수 주변의 다른 마을과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슬렁슬렁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마침 알맞게 떠올라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뭇잎을 비추며 뒤편의 시계탑과 함께 완벽한 가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한참을 감탄하며 연방 셔터를 누르고 있던 그때 저 멀리서 우리의 일일 가이드 Luca로 추정되는 인물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Buongiorno!"

Luca와는 몇 가지 자잘한 사항을 문의하기 위해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터라 이미 친근한 느낌이었다. 서로 안부를 물으며 짧은 수다를 떠는 동안 투어 그룹의 모든 멤버가 모였다. 이제 꼬모호수를 출발해 자동차, 관광열차, 기차를 갈아타며 와이너리와 알프스 산맥, 또 스위스까지 하루 안에 둘러보는 다이내믹한 여정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Benina Express를 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역은 꼬모호수에서 동북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Tirano에 있었다.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창밖 풍경은 금세 시골로 변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라고 있는 밭이 나왔다가 그다음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쭉 늘어선 나무, 낮은 건물들이 번갈아가며 이어졌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와이너리에 잠시 들르는 것이 투어의 첫 번째 일정이었다. 우리는 키안티에 있는 와이너리에 가려고 계획해 두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커다란 통창이 달린 목조건물은 마음에 들었다. 이런 건물에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마시는 와인이라니, 시작이 좋았다.

와인 한잔씩을 마시고 다들 기분이 좋아진 채로 차에 올랐다. 와이너리에서 Tirano까지는 금방이었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각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주어졌다. 우리는 간단한 점심을 먹을 장소를 찾을 겸 마을 구경을 시작했다. 스위스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봐서 그런지, 스위스건 이태리건 가릴 것 없이 모두 생소한 나라지만 괜히 더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창밖으로 밭이 쭉 펼쳐졌던 것 같은데 콘도 빌딩이며 헤어 살롱 같은 곳이 들어서 있었다. 우리는 근처 식당의 노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다 눈에 들어온 길 건너편의 치과와 부동산 광고가 조금 생경하게 느껴졌다.


주문한 파스타가 기대와 전혀 달라 당황스러웠던 것을 빼고는 괜찮았던 식사를 마치고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기차역은 플랫폼만 덜렁 있는 것이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소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빨간 기차가 들어서는 순간 이곳은 여느 기차역이 아니게 되었다. 이태리 여행 중 손꼽게 좋았던 시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열차는 역을 출발해 워밍업을 하는 것처럼 양옆에 건물이 바짝 붙어있는 선로를 천천히 지났다. 그렇게 좁은 길을 통과하자 이내 멀리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광활한 초원이 펼쳐졌다. 눈이 시원해지는 경험이었다. 초원에는 그림 속에서나 볼 법한 하얀 집들이 있고, 소떼가 근처에서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열차는 우리를 싣고 색색깔 단풍이 든 산속을 통과했다가 눈 쌓인 산 봉우리를 멀리 두고 지어진 아치 모양의 다리를 건넜고, 다시 호수 옆을 지났다. 그런 경외로운 자연 속에서 창문 밖으로 몸을 빼고 청량한 가을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행복해진다.

90분가량 열차를 타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스위스 국경을 넘어 있었고, Ospizio라는 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St. Moritz라는 마을에 들른다. Tirano처럼 스위스에 맞닿은 마을이 아니고 정말 스위스에 입성한 것이다. 얌전하지만 세련되었다고 하면 말이 될까. St. Moritz는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은 건물들이 고상한 느낌을 풍기며 자연과 어우러진 곳이었다.


남의 나라 마트 구경을 좋아하는 우리는 잽싸게 스위스의 마트에도 들르고, 열 발자국에 한 번은 사진을 찍으려 멈춰 서느라 바빴다.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유명하다는 초콜릿 가게에 앉아 핫초코 한 잔을 마시는 건데, 그걸 못하고 온건 아쉽다.

각자의 방식으로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투어 멤버가 다시 모였다. 아침부터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모두가 말수가 현저히 적어진 상태로 다시 차에 올랐다. 차를 타고 산을 내려가는 길이 험해 멀미를 했고, 졸다 깨다를 반복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게 투어의 마지막 도시 Fiume Mera에 도착했다. 피곤한 우리는 여기도 지오반니가 있네, 하며 사진을 한 장 남겼고, 다른 기록은 없다.

다시 차를 타고 도착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역에서 Luca와 인사를 나눴다. 여기서 우리는 밀라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이태리 여행의 첫 대도시로 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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