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꼬모호수
꼬모호수를 첫 번째 행선지로 정한 건 11월에 시작한다는 비수기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동선을 전략적으로 짰다고 좋아하며 밀라노 공항에서 2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온 우리를 맞이한 건 당장이라도 장대비를 뿌릴 것 같은 시커먼 먹구름이었다. 우리가 그 먼 길을 달려온 것은 눈이 시릴 만큼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을 담은 호수 꼬모호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실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that happy, sunny place"로 명성을 알린 호텔도 먹구름 아래에서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짝이는 호수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오렌지 빛 파라솔, 쨍한 노란색 건물의 호텔, 머릿속에 수십 번을 그려 그대로 각인이 되어버린 이미지는 그렇게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먼 길을 오느라 허기졌던 우리는 실망스러운 마음은 접어두고 호텔에서 간단한 식사를 먼저 하기로 한다. 오렌지 빛 차양막이 내려진 테라스와 연결된 식당. 날씨마저 화창했으면 얼마나 멋있었을지 아쉬워하며 메뉴를 살펴보는데 이럴 수가, 저 멀리서부터 구름이 서서히 걷히는 것이 보인다. 날씨가 다시 변덕을 부리지는 않을지 조바심이 나면서도 구름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태양 덕에 정말로 신이 났다. 여행의 시작이 좋다. 이태리에서의 첫 번째 식사에 대한 기억이다.
꼬모호수는 우리의 바람대로 시퍼런 하늘을 배경으로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첫 일정은 스타워즈의 웨딩 세리머니 촬영장소로 알려진 발비아넬로 빌라(Villa del Balbianello)다. 싱가폴에서 온 우리에게 더없이 반가웠던 서늘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쉬며 걸으니 도보로 15분이 넘게 걸리는 길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쪽에는 호수를, 반대편에는 산을 두고 난 길을 따라 도착한 빌라에서 가이드님과 함께 투어를 시작했다. 18세기에 지어졌다는 이곳은 조그마한 실내 장식부터 구석구석 정성스레 손질된 정원까지 화려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옛날 여기에 살았다는 귀족의 이야기는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들려서, 여행 뒤에 돌아가야 할 현실이 있는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던 곳, 빌라의 시그니쳐와도 같은 우산나무, 주인과 산책을 나온 개를 비롯해 곳곳을 사진으로 남기고 투어를 마무리했다. 햇볕이 있었지만 실외에서 몇 시간을 보냈더니 몸이 으슬으슬해지기 시작했다. 호텔로 돌아가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 반신욕을 즐기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코모호수에서의 둘째 날은 아침식사로 열었다. 조식 뷔페가 너무나 아름답게 차려져 있어 이러다간 정말로 귀족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먹구름이 이내 정신을 차리게 해 주었다. 식사를 하는 순간에도 구름이 멀리서 자꾸 모여드는 것만 같다. 심상치 않은 날씨를 받아들이고 이날의 목적지인 벨라지오를 가기 위해 페리에 탑승했다.
벨라지오는 상상 속 유럽 골목길의 느낌을 처음으로 마주한 곳이었다. 좁은 길가를 따라 늘어선 가게들과 노천 식당들이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주었는데, 비수기가 다가왔기 때문인지 날씨 탓인지 거리는 활기를 조금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조용한 회색빛 거리를 따라간 곳에는 호숫가에서 놀고 있는 오리가족이 있었고, 오픈 준비를 하며 손님을 기다리는 식당 주인, 그리고 우리처럼 그 모든 게 신기한 관광객들이 있었다. 한창 마라톤 경기가 펼쳐지고 있는 마을 중심부를 지날 때에는 선수를 응원하는 사람들과 그걸 중개하는 카메라도 구경했다. 당시에는 지나가는 순간이었는데, 골목을 돌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거리에서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과 오리들)을 눈에 담았던 이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조금 더 걸으니 우리의 목적지였던 멜지 데릴 빌라(Villa Melzi D'Eril)가 나타났다. 전날 들렀던 빌라가 아기자기한 정원 같았다면 이곳은 시원하게 펼쳐진 숲의 느낌이었다. 대리석 장식이나 색색깔로 가꿔진 꽃은 없었지만, 위로 쭉쭉 뻗은 나무들과 그 옆에 펼쳐진 호수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게 가라앉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후에 보트투어를 계획해 놓은 탓에 불안해졌다. 호텔에 도착해 한숨을 돌리는 동안에도 그치지 않은 비를 무릅쓰고 투어를 강행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시간이 갈수록 굵어지는 빗줄기와 뱃멀미 때문에 아쉬운 경험이 되고 말았다. 다음날 더 멀리까지 나갔던 보트 투어 역시 날씨운이 따라주질 않았다. 보트는 참 예뻤었는데.
걷힐 기미가 없는 먹구름 탓에 전망대에 가려던 계획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호텔 곳곳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00년 역사의 호텔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넘쳐났고, 곳곳에는 그런 호텔과 세월을 함께한 빈티지 가구가 넘쳐났다. 옛날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유리 거울이며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벨벳 소파 같은 것에 둘러싸여 종일 내리는 비 냄새에 얹어진 은은한 장미향을 맡으며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를 즐기는 시간에 불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테라스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에는 일 년 내내 무더운 싱가폴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차가운 공기를 원 없이 들이마셨다. 한밤중에 발코니에서 비를 맞으며 자쿠지를 하고 그 뒤에 컵라면을 먹는 호사 또한 예상을 벗어난 날씨 덕에 가능한 것이었다.
감질나게 화창했지만 행복했음은 확실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맑은 하늘을 보인 꼬모호수에 야속한 마음이 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호텔에 안녕 인사를 하고 수상택시에 가방을 실었다. 밀라노에 가기에 앞서 한 군데 더 들를 곳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