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을 펼쳐라.
“전형적인 19세기 유럽식 건물에 어디선가 한옥이 날아와 가로 꽂혀 위태롭게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옥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기존의 건물을 붕괴하거나 파손하지 않는 선에서 그 건물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유지 보수를 하고 있는 흔적들이 발견된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카펫으로 된 마루, 신발을 신은 채 돌아다니는 거주자, 전형적인 유럽의 아카데미즘을 보여주는 유화 페인팅에 이르기까지 유럽식 건물에는 서양식 생활습관을 보여주는 살림살이들이 보인다. 반대로 이 빌딩에 추락한 것 처렁 보이는 한옥의 내부에는 서까래, 문지방, 좌식 생활 습관을 보여주는 매우 한국적인 소품들이 발견된다. 이 한옥의 집주인은 어디에 있을까? 행방을 찾다 보니, 건물 뒤 마당에 낙하산이 펼쳐져 있고 근처에 한 동양인이 보인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이 어떤 연유로 지구 반대편으로 휩쓸려 갔고 그곳에 별똥별처럼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끔찍한 사고 혹은 재앙처럼 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그 와중에 살아남겠다고 낙하산을 이용해서 뒤 마당에 연착륙한 주인공의 호기로움이다. 이 센스 넘치고 유쾌한 주인공은 처음에는 분명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겠지만 지구반대편으로 떨어진 이곳에 결국은 적응하여 잘 먹고 잘 살았으리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서도호 (1962~) 작가이다. 태어나서 평생을 살아온 평창동의 한옥을 떠나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의 문화적 충동을 Fallen Star라는 텍스트 기반의 작업에서 설치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2006년 11월, 나는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Fallen Star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서도호 작가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십 대 후반의 애송이 큐레이터였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반년정도 리움 미술관의 인턴 큐레이터를 거쳐 한 미술협회의 큐레이터로 일 년 정도 근무한 것이 전부였던 나에게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서도호 작가의 전시를 책임 진행한다는 것은 좋은 기회이자 동시에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뉴욕에 위치한 작가의 전속 갤러리와의 소통에서부터, 설치, 홍보, 판매 등 전시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진행하고 있었다(마흔 중반이 된 지금 생각해 봐도 과한 업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자간담회는 매우 부담스러웠다. 내놓으라 하는 언론사의 기자들 앞에서 작가와 함께 신작에 대한 간담회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기자 간담회를 앞두고 서도호 작가의 일대일 과외(?)가 시작되었다. 사장을 제외하고는 별도의 사무실이 없었던 갤러리에서 이층 전시장의 작은 리셉션 데스크가 나의 사무실이었다. 관람객으로 붐비는 전시장 한편, 수시로 울리는 전화기를 앞에 두고 비좁은 책상에서 갖은 방해를 받으면서 작가는 신작에 대해 설명했다. 열악한 환경에 불평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이 거장은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주변의 방해에는 그러거나 말거나 엄청난 집중력으로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진중한 성격으로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작가는 예상대로 엄격하고 단호하게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고 나는 호랑이 선생님 앞에 학생처럼 숨 조이며 열심히 필기를 했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업을 ‘현대인의 유목민적 삶’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안타까워했다. 이번 작품 Fallen Star에서는 한 개인이 낯선 곳에 이주하여 느끼는 문화적 충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두 문화사이에서 저글링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답게 이것이 물질적/비물질적 공간에서 어떻게 작동되는지, 과연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유동적인 것인지에 대해 포스트 모더니즘의 담론을 이끈 철학자들의 글을 언급하며 설명했다. 작품에 대한 그의 애정과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순도 백 프로의 진정성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의 진지함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회답하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모두 노트에 적었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빽빽하게 적힌 노트를 통째로 암기했다. 최대한 전시에 누가 되지 않도록, 가능한 작가가 설명한 것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키워드에는 하이라이트를 그어가며 암기했고, 다행히 기자간담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주와 불시착, 그리고 생존.
당시 나는 이러한 작가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의 경험치가 부족했다. 20대 후반까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왔던 나는 이주라는 단어가 갖는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의미를 알고 있지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귀가 닳도록 듣고, 입이 마르도록 콜렉터들에게 설명했던 단어였지만 실제로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의 경험치가 부족했던 것이다. 홈 그라운드를 떠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새로운 터전에서 자리 잡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6년 이주와 불시착을 주제로 한 서도호 작가의 전시 이후 정확히 15년 만인 2021년에 나는 모국을 떠나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주한 지 약 2년이 지나서야 그가 말한 이주와 불시착이 어떤 의미인지 그 속에서 끊임없이 저글링 하며 생존하려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깨닫기 시작했다. 실제로 나와 남편은 단 한 명의 지인도 없는 부다페스트로 이주했다. 전사회주의 국가로 동유럽권에 속하는 낯선 문화를 가진 세계로 우리는 서도호 작가말처럼 별똥별처럼 뚝 떨어진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우리는 작가의 작업 속 19세기 유럽의 건물과 같은 전형적인 유럽식 플랫에 거주한다. 김치찌개와 라면을 끓여 먹으며 보일러가 고장 나면 고치고, 벗겨진 페인트를 칠하고 문틀에 실리콘을 덧대 바르는 등 잘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보수를 한다. 집 밖으로 나가면 한국 사회와는 다른 현지 문화에 골머리를 썩으며 하루하루를 곡예사가 저글링 하듯이 살고 있다.
이주를 선택한 이들에게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반면 고생은 백 프로 보장된다. 익숙했던 문화에서 떠나 이질적인 문화에 불시착하는 이들은 결국 불시착한 상태로 정착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주는 모험이요, 어쩌면 인생을 건 도박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모험은 사양하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인류는 꾸준히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발견하여 그곳으로 이주해 왔다. 더 나은 인생을 위해 각자 다른 가능성을 꿈꾸며. 그렇다면 나는 왜 떠나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