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17주기를 맞이하며
올여름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정든님이 과꽃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여지없이 8월 4일입니다. 과꽃이 여름을 뚫고 핀 계절입니다.
정든님(고 정은임 아나운서)이 작별을 고한 지, 17년이 흘렀습니다.
지난 주말 쿠씨네(건대 KU시네마)에서 상영한 <우리, 둘>를 보러 갔습니다. <우리, 둘>GV를 위해 정성일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정성일 선생님은 정든님이 진행했던 <정은임의 FM영화음악>에서 게스트로 출연하셨죠.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이날 정 선생님은 영화 이야기를 하며 죽은 사람이 죽지 않고 산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음을 말했습니다. 문득, 17주기를 앞둔 정든님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에게 정든님도 그런 존재니까요.
그렇게,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나 봅니다.
계속 맹위를 떨치는 코로나19도,
기후위기의 그늘 아래 미친 뜨거움을 발산하는 폭염도,
흔들리는 올림픽을 끌고 가는 스포츠 선수들의 아름다운 몸짓도,
아쉽게 일본 야구대표팀에게 졌지만 잘 싸운 한국 야구대표팀의 눈물도,
오늘 하루, 이 모든 것과 함께 떠올리는 정든님입니다.
섣부른 설레발이지만, 정든님이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했다면,
조곤조곤하지만 강단진 목소리로 사회적 약자에게 점점 더 가혹해지는 세상에 한 마디 던졌을 겁니다. 예전처럼 말이죠. 신영전 선생님과 정희진 선생님이 건넨 이 말씀에도 동의하면서요.
"이번 올림픽은 적어도 ‘부흥’이 아니라 ‘추모’의 올림픽이 되어야 하고, 전쟁, 기후위기, 전염병 창궐로 멸망을 앞둔 인류가 성, 인종, 국적과 상관없이 함께 싸우기를 결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신영전_<천천히, 낮게, 약하게-다 함께>)
"실업, 기후위기, 미세 플라스틱이 몸에 축적되는 시대에 제프 베이조스나 엄청난 부자를 제외하곤, 나이 불문 모두가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더워서 미칠 지경이다’. 그러니, 누가 더 억울한가를 경쟁하지 말자. ‘적’은 따로 있다. 나는 조금은 비굴한 태도로 젊은이들에게 부탁한다. 당신들은 시간이 있지 않은가. 그 시간을 소중히 하라는 애정 어린 조언을 잊지 말라. 나이 들었다고 모두 설명충은 아니다. 당신들이 적대해야 할 이들은, 청년층의 ‘취업’을 ‘시간당 최저임금’ 논의로 변질시킨 정치인과 자본가들이다. 사회 변화를 원하진 않으면서 당신들에게 아부하는 이들을 믿지 말라. 우리는 각자 나이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가난하고 나이 든 이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간주되는 이들은 존중하자. 이것이 공정이다."
(정희진_<모두가 억울한 “내 나이”>)
그렇게 추모하고 추억합니다. 2년 전에 15년 동안의 여정을 마치고 이젠 영원히 박제될 추모바자회도.
모두 그렇게 살아서 만나길 고대합니다. 사부아 비브르(Savior vivre). 삶을 즐기며 삶답게!
당신 각자의 삶이 중요합니다. 살아서 우리 삶을 다시 나누면 좋겠습니다.
꽃 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 이별이 아니구요
마당 한 모퉁이에 꽃씨를 뿌립니다
꽃 피는 날에서 꽃 지는 날까지
마음은 머리 풀어헤치고 떠다닐 테지요
그대만이 떠나간 것이 아닙니다
꽃지는 날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요
그대의 뒷모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새로 잎 피는 길을 갑니다
_구광본, <꽃 피는 날, 꽃 지는 날>, 1995. 3. 31. <정은임의 FM영화음악> 1차 마지막 방송 오프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