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9시의커피] 우리의 4월에 ‘세월’을 건네며
‘밤9시의 커피’는 다정하고 환대가 넘치는 가상의 카페입니다. 불면을 부르는 커피가 아닌, 분주한 일상이지만 늘 깨어있는 존재로 남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을 상징합니다. ‘음료, 그 이상’인 커피를 매개로 가상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함께 상상하고 공감합니다. <편집자 주>
“슬픔은 안길 사람을 찾지 못하면 유령처럼 떠돌면서 계속 말을 걸 것이고, 형태를 바꿔가며 찾아올 거예요. 사회적 참사에 응답하는 일은 우리 같이 남겨진, 산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이에요.”
_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 세월호 생존자, 형제자매, 그 곁의 이야기≫ 중
한차례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손님들이 북적북적, 휩쓸고 갔습니다. 기지개를 쭉 켜고, 안도의 숨을 쉽니다. 역시 봄이구나, 이 말이 절로 나옵니다. 유동 인구가 겨울과 비교할 수 없이 늘었습니다. 골목길에도 사람이 북적입니다. 골목길 안에 있는 카페 <밤9시의커피>도 영향을 받을 정도니까요. 서둘러 봄 레시피도 준비했습니다. 벚꽃 시즌용 메뉴를 비롯해 ‘우리의 4월’을 위한 메뉴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왈칵 눈물샘이 터졌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맞이한 봄날인데, 별일도 없는데, 분주했던 한때를 지나 커피 한잔 마시는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문득, 눈에 들어온 이 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4월에 기억해, 봄’.
단골들이 4월 들어서 벽에 붙여 놓은 문구였습니다. 늘 이맘때 <밤9시의커피>에 모였던 단골들이 올해도 일찌감치 뭔가를 준비했습니다. 맞습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입니다. 단골이자 마을 오지라퍼 ‘왈칵’이 <밤9시의커피>를 마을 추모·애도 공간으로 꾸미자고 제안했고, 단골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였습니다. 저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죠. 이 공간은 마을 모두의 것이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억과 추모였으니까요. 잊지 않겠다는 다짐만큼이나 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각자 세월호와 관련한 자신의 기억과 물건, 이야기를 꺼내놓았습니다. POP를 만들었고, 우리의 기억을 전시했습니다. <기억해, 봄>이라는 다큐 포스터도 붙여놨네요. 세월초 참사 희생자 중 다수를 차지하는 단원고 희생자들과 동갑내기 청소년들의 시선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작으로도 선정됐다네요. 과거 회상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고 추모해야 하는지를 다뤘다고 했습니다. 4월 16일, <밤9시의커피>에서 상영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커피에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습니다. 잔물결이 일어납니다. 커피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도 4월인 걸 아는구나. 커피의 눈물인지, 눈물의 커피인지 알 수 없지만, 커피가 살포시 웃습니다.
바깥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벚꽃이 팡팡 핍니다. 봄밤, 조명을 받아 화사함을 더욱 뽐냅니다. 벚꽃 비기닝 시즌. <밤9시의커피> 앞에 있는 벚나무들도 4월의 눈물을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10년 동안 유가족들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물이 있었을까요. 장국영 자살, 제주4.3 등을 포함해 4월은 T.S 엘리엇의 <황무지> 시구처럼 ‘잔인한 달(April is a cruel time)’입니다. 70년대 전성기를 누린 하드록 밴드 딥 퍼플도 <April>이라는 노래에서 같은 말을 읊조리죠.
벚꽃이 문득, 슬퍼집니다. 마치 4월에 희생당한 모든 피가 세상을 분홍빛으로 짧게 물들이면서 잊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서요.
다시 카페 벽을 바라봅니다.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10년, 한국 사회는 달라졌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향한 성찰을 요구하는 문구네요. 이것도 잊지 말고 늘 품어야 할 질문입니다. 느닷없이 ‘60+기후행동’이 떠올랐습니다. 어르신 기후 활동 단체입니다. 이른바 (경제적) 고도성장을 이끌고 혜택을 누린 60세 이상 세대가 자신들이 만든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생각합니다. 즉, 고도성장, 같은 말의 다른 판본인 환경파괴에 대해 반성하고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노년,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들이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돼야 할 시민의 책임과 과제가 아닐까요.
사회적 참사 앞에서 제대로 추모하지 못하는 사회란, 제대로 된 사회일까요. 그래서 ‘왈칵’의 제안이 고마웠고, 함께 마을 추모를 준비하는 단골들이 고마웠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요. 우리는 이렇게 바꿔 부릅니다. ‘한 시민이 안전하게 살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런 사소하고 작은 미덕을 지켜나가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 만났던 다큐영화 <세월: 라이프 고즈 온>에 나온 참사 유가족의 말씀이 심장에 콕 박혔습니다. “내 아이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나는 내 가족만 지키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내 아이의 친구가 안전해야 하고, 우리 동네에 있는 다른 모든 아이가 안전해야 하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안전해야 내 아이의 안전도 지킬 수 있더라”
우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기억하고 이를 위해 추모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않으면 마음속에 자리한 이 돌덩이에 각자 혼자서 짓눌릴 것 같았으니까요. 세상을 바꾸자는 거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우리의 4월에 기억해, 봄’은 함께 이 돌덩이를 꺼내놓고 작은 날갯짓을 펼치는 우리만의 몸짓입니다. 그저 우리가 연결돼 있음을 기억하고 확인하길 바랄 뿐입니다.
앞선 흉포한 재난들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우리는 여전한 잠재적 사회적 참사 앞에 노출돼 있습니다. 자기 검열과 공권력의 폭압에도 발가벗겨져 있고요. ‘파국’으로 향하는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풍경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0년 혹은 그 이상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사회적 참사들의 유족들이 보여주는 힘과 위로 때문입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조차 하지 못한 사회에서 유족들이 품고 있을 절망과 환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들은 여전히 기억 투쟁과 삶을 지켜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벚꽃이 피었다 집니다. 벚꽃 엔딩은 순식간에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벚꽃이 진다고 그대들을 잊은 적 없습니다. 잊지 않습니다.
<밤9시의커피>는 ‘세월’이라는 블랜딩 커피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벚꽃 시즌 메뉴가 끝난 뒤 찾아옵니다. 시간이 허락하고 함께 마음을 보태고 싶다면, <기억해, 봄>을 상영회에서 함께 보면 좋겠습니다. 아쉽게 오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기억해, 봄>은 4월 한 달간 다큐멘터리 전문 OTT VoDA(https://voda.dmzdocs.com)에서 관람할 수 있거든요.
제대로 기억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을 담은 다른 작품들도 찾아보면 좋겠네요. <생일>(2019), <너와 나>(2023) 같은 극영화를 비롯해 <나쁜 나라>(2015), <당신의 사월>(2021), <장기자랑>(2023) 등이 우리를 연결해 줄 겁니다. 특히 <바람의 세월>과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은 지금 4월 극장에서 만날 수 있어요. 편안하게 소리 내어 웃음꽃을 피울 수 있는 작품도 있으니, 우리의 4월은 진도 앞바다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4월을 함께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을 시(임신행, <사월>)에 담아 보냅니다.
사월엔...이 땅의
산과
산에서
마을과
마을에서 울려 내리는
강줄기의 짙푸른 물을 보며
물소리를 들을 일이다.
목련꽃 이파리에 앉은 그 눈물 같은 이슬로
눈을 닦고...새순이
어떻게 이 땅을 비집고 일어서는가를
살펴볼 일이다...참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젊은 영혼을
달랠 일이다.
글 | 낭만(김이준수)
* 카페문화웹진 카페인(https://www.cafein21.co.kr)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