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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Sep 09. 2024

커피도 사랑도,
‘그해 여름’에 빛난 추억

[밤9시의 커피] 잊지 못할 여름을 보내는 법

‘밤9시의 커피’는 다정하고 환대가 넘치는 가상의 카페입니다. 불면을 부르는 커피가 아닌, 분주한 일상이지만 늘 깨어있는 존재로 남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을 상징합니다. ‘음료, 그 이상’인 커피를 매개로 가상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함께 상상하고 공감합니다. <편집자 주>


변기 물을 내리고 전등을 켜고, 깨끗한 물,
그리고 맛 좋은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는 쉽다.
좀 더 어려운 것은 이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_ 쇼펜하우어


잊지 못할 여름이었습니다. 절기를 무시한 폭염이 이어졌고, 열대야는 연일 최장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올해가 지구 역사상 가장 더운 해가 될 거 같다죠? 지난 7월 기온을 따져봤더니, 관측 사상 가장 더운 7월이었답니다. 미국 국립 해양대기국(NOAA)은 이렇게 발표하면서 지구 기온이 14개월 연속 매달 역대 최고 기온을 경신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아울러 올해가 역대 가장 무더운 해가 될 가능성이 77%, 톱 5에 들 가능성은 100%라고 밝혔습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올여름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이구동성으로 “평생 가장 더운 여름(밤)”이라고 외쳤지만, 내년, 내후년 같은 말을 뱉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올여름은 ‘남은 일생에서 가장 선선한 여름’이 될지도 모를 일이죠. 무언가 우리의 진짜 여름을 앗아간 기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저지른 악행(!)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커피는 안녕할까요?


문득 커피 산지에 있는 커피나무와 꽃, 열매, 땅, 안개, 농부 등 모두의 안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여름이었을까요? 대부분 주류 미디어는 기후플레이션(기후+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커피값 상승에만 관심을 둡니다. 기후가 바꾼 미래에는 커피를 마시지 못할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도 덧붙입니다. 커피 소비자 입장에서만 접근할 뿐입니다.  


문득 《커피가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기후변화와 커피의 미래》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성인 1인당 커피 소비 세계 1위인 핀란드의 두 청년이 브라질 커피농장을 누비며 쓴 책인데요. ‘커피 없는 미래’를 경고하는 가장 큰 요인은 기후위기지만, 이들은 더 시급한 문제도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지 않는 유통 체계, 턱없이 낮은 임금과 노예노동을 방불케 하는 노동환경,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 등 애써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문제를 건드립니다. 모든 생태계와 이해관계자를 아우른 폭넓은 시각입니다.  


홀짝, 커피를 한 모금을 마십니다. 따스한 기운이 입안을 거쳐 심장으로 전해집니다. 저는 여름에도 따뜻한 커피를 주로 마시거든요. 그 온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폭염이 뿜는 열기와 확연히 다른 온기입니다. 눅눅하지도, 끈적하지도 않은 채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매직입니다.

알싸한 향이 코를 간지럽힙니다. 이 향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몽상이 꼬리를 뭅니다. 지속 가능한 커피와 재배는 어떡해야 가능할까? 한 잔의 커피로 대멸종을 늦출 수는 없을까? 아직 답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대폭염의 여름이 저물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올 여름이 그렇다손, 여름을 마다하고 싶진 않습니다. 언제나 큰 추억은 여름 안에 있었으니까요. 


당신에게 ‘그해 여름’은 언제였나요?


어떤 문장은 읽는 순간, 우주의 모든 걸 멈추게 한다는 걸 아세요? 그리고 과거 어떤 순간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이 문장이 그랬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나의 어느 날은 여름이었다.” 이를 눈에 담는 순간, ‘그해 여름’으로 타임 리프(time leap)했습니다. 입가엔 배시시 웃음이 흘렀죠. 그해 여름 나를 감싸던 공기, 냄새, 풍경, 바람 그 모든 게 행복을 위해 블렌딩 되고 있었습니다. 그 여름, 커피 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가장’이라는 말은 단 하나의 것에만 붙일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 ‘가장 행복했던 시절 중의 하나’, 이런 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온리 원’ 일 때 가장이라는 부사를 붙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겐 그해 여름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선 다음 문장을 읽습니다. “가장 절망했던 날도 여름에 속해 있다.” 다시 타임 리프 합니다. 그해 여름이 그랬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훅~ 더운 열기를 품고 불어왔습니다. 그 슬픔에 질식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내가 있었습니다. 커피 향은 쓰디썼습니다. 각기 다른 여름이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며 여름을 감싸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그해 여름’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내년에는 <밤9시의 커피>에 ‘그해 여름’을 공모해 전시하는 소소한 이벤트도 가져볼까 합니다. 당신도 함께 참여해 주면 좋겠네요. 


어느 독서클럽에서 제 닉네임은 ‘아모르 그란데’였습니다. 아모르(amor)는 사랑을 뜻하는 스페인 말이죠. ‘mor’는 죽음, ‘a’는 저항. 즉, ‘사랑은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그란데(grande)는 ‘큰, 높은’이라는 뜻이니, 아모르 그란데는 ‘큰 사랑’입니다. 실제로 큰 사랑을 한다기보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말을 알려준 풍류쟁이 소설가 한창훈 선생은 이 단어(아모르)를 알고 나서야 독한 불면과 눈물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람들이 거듭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여름은 사랑에 빠지기 좋은 계절이었습니다(과거형입니다!). 그래서 태양은 죽음도 불사하고 저리 뜨겁게 불타올랐을 테니까요.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를 하기에는 아무렴, 겨울보다 가을보다 봄보다 여름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름의 낭만도 대폭염 앞에 점차 눅눅해지고 말 것 같은 슬픈 예감도 듭니다. 이 예감은 틀렸으면 좋겠네요.


또 다른 여름을 기다리며


뜨겁고 아름다웠던 여름날을 기억할 때마다 그려지는 풍경이 있습니다. 하늘은 좋았고 바람은 후끈합니다. 짙은 녹색을 발하는 나무와 풀이 가득한 정원은 싱그럽네요. 함께한 사람은 더없이 맑고 청명합니다. 온기를 발하는 커피는 향기롭습니다. ‘아모르 그란데’가 익어가기에 충분히 좋은 떼루아 아닐까요? 폭염에 쪼그라든 여름이 아닌 우리가 알고 있던 진짜 여름을 다시 호명하고 싶습니다. 


<밤9시의 커피> 단골들이 자리를 비워 한산해진 틈을 타서 넋두리를 풀었네요. 여름을 둘러싸고 종횡무진 오가는 생각이 커피 향에 묻었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날도, 가장 절망했던 날도 여름이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름은, 우리 생애 다시는 오지 않을 여름입니다. 비록 올여름, 폭염과 꿉꿉함에 처진 달팽이처럼 엉금엉금 기어갔지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듯이, 내년에는 내년의 여름이 다가올 겁니다. 


내년 여름께, <밤9시의 커피>에는 이렇게 써놓으려고요. “준비는 되어 있어. 자, 네 차례야. 잊지 못할 여름을 보내자.” 그렇게 만화 《릴리프》가 부추겼듯 말이죠. 아, 그리고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오드리 헵번)가 잊지 못할 휴일을 보낸 계절도 여름이었답니다. 커피가 좋은 계절, 여름. 사랑하기 좋은 계절, 여름. 자, 우리 모두의 차례야, 잊지 못할 여름을 보내자. 어떤 이야기들이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여름을 기다립니다. 


글 | 낭만(김이준수)


* 카페문화웹진 카페인(https://www.cafein21.co.kr)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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