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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Jul 23. 2018

외롭게 하루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밤9시의커피] 정은임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 고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오늘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시나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_ <정은임의 FM영화음악> 2003.10.22. 방송 오프닝 멘트     

<밤9시의커피>는 8월 4일 ‘아름다운 하루’를 만들어요. 한 사람 덕분입니다. 이 사회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민을 생각하고 그것을 영화로 풀어내며 음악을 들려주던 사람. 어느 날 새벽, 백여 일을 고공 트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던 목소리를 가진 사람.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는다며,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 말하던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려준 사람입니다.      


지금, 그 사람은 없어요. 

14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죠. 하지만 ‘라디오 시대’가 유효했던 시절, 새벽을 밝히던 목소리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밤9시의커피>가 마련합니다. 그 목소리가 전하는 영화와 음악, 세계 등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세우고 마음에 담았던 청취자라면, 누구든 발걸음을 옮겨주세요. 8월 4일 그녀가 세상에 작별을 고했던 날, 커피 한 잔에 추억 한 모금 나누고 싶어요.


정든님님은 먼 곳에 그러나 마음은 함께     


고 정은임 아나운서입니다. 우리는 그를 ‘정든님’이라고 불러요. 

<밤9시의커피>는 그러니까 그날, 정든님의 목소리를 만납니다. 제가 이날 내리는 커피는 ‘정든님’이에요. 에티오피아 리무(Limmu) 지역에서 자란 커피입니다. 유기농법으로 키운 커피나무에서 자란, 단맛과 산뜻한 신맛이 조화로워요. 묵직한 아로마와 와인과 유사한 향을 지녔고 상대적으로 카페인이 적은 커피를 내리려고요.     


이 정든님 커피와 함께 그때 그 시절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이하 <정영음>)이 흐르기 시작하면, 어느덧 추억 속으로 들어갈 거예요. 혹시 기억하나요? 새벽녘, 그럼에도 ‘매직 아워(Magic Hour)’와 같은 시간이었죠. 물론 매직 아워는 본디 해가 넘어가 사라졌지만 밝은 빛이 아주 약간 남아 있는, 하루 중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순간을 뜻하지만, 정든님을 만나는 시간 또한 그런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목소리를 만나는 시간 또한 그래요. 정든님은 없지만 그 마음이 밝은 빛처럼 여러 사람의 마음에 남아 있는 순간일 테니까요.       


어쩌면 호사일지도 모르겠네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거나 방송이 공기에 흐르는 가운데 무언가 하고 있었던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호사 같은 것이요. 그렇게 되돌아가면 눈물이 방울방울 흐를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또 어때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그뿐. 


사람들은 느닷없이 만나고 헤어지며 또 잊히죠. 그 사실이 견디기 힘들지만 그것 또한 사람살이 임도 잘 알고 있어요. 기억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딜 재간이 없어요. 그저 차츰 옅어지고 희미해지는 기억의 자락을 아쉬워하는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죠. 정든님이 세상에 없었던 시간, 세상은 그 공백에 개의치 않고 톱니바퀴를 계속 굴리고 있어요. 우리네 사람살이도 마찬가지죠. 나이를 먹고, 세월을 머금습니다.      

커피 한 잔이 그 세월을 아스라하게 만드네요.     

사람의 있을 곳이란...     


정든님이 작별을 고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20대도 떠났다고 토로했었죠.  

“당신이 있어 물 찬 장화를 신은 것처럼 불편하고 고달팠던 20대를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저도 당신처럼 그 누군가의 20대를 버티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토로의 끝에 <정영음> 방송 당시 전하지 못한 “사랑합니다”라는 뒤늦은 고백을 하기도 하더군요.     


<정영음>은 그랬었습니다. 당시 청취자들에 의해 PC통신에 둥지를 튼 팬클럽 ‘정영음’은 아나운서를 위한 최초의 팬클럽이었고 유별난 구석이 있었어요. TV 프로그램도 아니고 라디오, 그것도 대부분 잠들어있을 법한 시간대, 더구나 영화음악이라는 한정된 장르를 다루는 프로그램에 정은임을 향한 팬들의 애정은 남달랐어요. 


그건 정은임의 ‘힘’이었죠. <정영음>은 한 시대의 ‘초상’이었고요. 1990년대 ‘영화’를 좋아하던 이들에게 정은임은 잊지 못할 이름이에요. 그의 분신과도 같던 <정영음>은 영화 강좌 역할을 했으며 당시 영화 붐을 주도했다는 평가도 받았죠. 불을 끄고 잠자리 맡에서 듣는 그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때론 결기가 묻어있었어요. 순수하고 열정적인 감수성의 흔적이 묻어 나왔죠. 정은임이 들려주는 영화음악은 때론 영화보다 더욱 감미롭게 마음을 헤집기도 했고요. 떠올리자면 그런 <정영음>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정은임은 뉴미디어 시대의 도래로 뒷방으로 밀려난 라디오 시대의 마지막 스타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정은임’은 마음에서만, 기억의 회로를 돌릴 때에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됐어요. 더 이상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치지 못하고, 희망의 불꽃을 지피던 그 나지막한 음성은 없습니다. 디지털로 박제된 ‘과거’만이 남아 있을 뿐.      


그런 정든님을 만나고 듣는 시간. 이 세상에 없는 정든님이지만, 그가 우리 곁에 있다고 느끼고 싶다면 <밤9시의커피>에서 커피 한잔 나눠요. 정든님 덕분에 만나 각자의 추억을 나누면 좋겠어요. 물론 그 목소리를 듣고 혼자 추억을 곱씹어도 좋고요.      

정든님 없는 세상, 혼자든 여럿이든 살아남은 자로서 가지는 슬픔을 공유하고 싶어요. 정든님은 우리에게 큰 선물을 준 셈이네요. 정든님과 <정영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추억을 나눌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그래요. 정든님은 <정영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세월이 흐른 뒤, 영화감독이 되고 아나운서가 되고 기자가 되고 심지 곧은 청년이 되어 나타났을 때 참 기뻤다고 했어요. 정든님을 기억하고 좋아하며 존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아래 문장처럼.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가끔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이도 있다. 그럴 경우 가장 중요한 실존적 과제는 우리의 삶에서 그들의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만들어 준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방법이다.” 
_ 《철학자와 늑대》(마크 롤랜즈 지음/강수희 옮김/추수밭 펴냄) 중에서

커피 한 잔에 사람의 있을 곳을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나 봅니다.      


작은 가치들이 쌓일 때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란, 어쩌면 허접쓰레기 같은 세상의 굴레에 치여 돌아갑니다. 정든님이 떠난 뒤에도 세상은 약자들을 향해 여전한 차별과 혐오의 폭력을 서슴없이 가하고 벼랑으로 몰아넣고 있어요. 정든님은 그런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건넬까요. 차분함 속에 숨길 수 없는 ‘분노’를 담아내던 그 목소리가 그리워요. 정든님이 지금도 마음에 살아 숨 쉬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 사회의 풍경을 정든님이 어떻게 이야기할까, 상상하면서 지금 나의 태도와 관점을 곧추세우기도 하니까요.


살아남은 우리는 그렇게 뚜벅뚜벅 하루를,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밤9시의커피>는 8월 4일, 살아남은 당신과 함께 소중한 사람을 추억하고 담아내고 싶어요. 그리고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하루’를 권합니다. 라디오 등을 통해 정든님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매년 기일 즈음, 아름다운 가게에서 추모바자회를 열고 있어요. 2018년 8월 4일, 아름다운가게 숙대입구점에서 역시 추모바자회가 열려요. 소중하게 모인 바자회 수익금, 기부금은 지역의 소외된 이웃을 돕는 ‘아름다운 희망나누기’로 쓰이고요.

매년 정든님 기일즈음 아름다운가게에서 열리고 있는 추모바자회 

김규항 작가의 말을 떠올립니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의 삶에서 작은 가치들이 쌓일 때 조금씩 좋아진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처럼 ‘소가행’(작은 가치가 쌓여 행복한 세상이 된다). 당신이 품은 작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가치가 <밤9시의커피>나 추모바자회를 통해 다른 가치를 만나고 진화할 거예요.      


우리, 그렇게 만나요. 커피 한 잔 나누면서, 바자회 물건을 기부하거나 사면서. 


<정영음>이 2004년 4월 마지막 방송을 하는 날, ‘단 한 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지 않았나’ 아쉬움을 토로하던 정든님의 군불이 횃불이 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정든님이 봤다면 좋아했을 영화 <원더>에 나온 대사 한 마디를 건넵니다. 정든님의 목소리였다면 더욱 좋았을 이 한마디, 당신도 입 밖으로 꺼내보면 좋겠어요.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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