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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Aug 22. 2018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는 시간

[ I'm in New York ① ] 뉴욕에서 모든 것을 놓다

정확히 1년 전. 뉴욕에 두 번째 발을 디뎠다.
5년 여동안 나를 쏟아부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뉴욕을 만끽하겠다고 떠난 길이었다. 그전부터 뉴욕 타령을 했었다. 한 번 짧게 내디딘 뉴욕에 혹했기 때문도  있지만 그래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접 만든 회사에, 대표까지 한 사람이 그만둬고 그래도 되느냐고, 지금까지 이룬 것이 아깝지 않으냐고, 나이도 적지 않은데 괜찮겠느냐고 묻곤 했지만,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Why Not?" 그게 뭐라고. 회사가 뭐라고. 일이 뭐라고. 관계가 뭐라고.
모든 사회적 관계, 의무에 스위치를 끄고(물론 한시적이었지만) 두서없이 맥락 없이 허허실실 뉴욕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게 당시 내 마음이었다. 다시 나는 한국에 돌아와 그 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뉴욕에 가서는 내 멋대로 뉴욕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다. 비록 몸이 태어난 곳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마음이 태어난 곳을 고향으로 삼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나는 뉴욕을 고향으로 못 박았다. 
나는 여전히, 뉴욕을 그리고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에 젖어있다.  


여름 아침 햇살이 눈썹을 들어 올리면 창이 다가와요. 창밖을 보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단독 주택들이 같은 햇살을 맞이하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싶은데 왼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면 강 건너 맨해튼의 전경이 훅 들어옵니다. 아아, 절로 탄성이 흘러나와요. 살포시 미소도 뜨고요. 그래요, 이렇게 좋은 아침, 실컷 만끽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고 있어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보다 더 깊숙이 더 넓게. 눈을 뜨고 오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따위의 사회적 압력을 거세한 상태죠. 해야 할 임무와 활동, 필요한 일이라는 핑계로 남들에게 신경 쓰는 일, 책임감, 의무 등을 손에서 놓아버렸어요.  


물론 평생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태어나서 처음, 아니 태어나서 한동안은 분명 그런 시간이 있었겠지만, 나 자신의 의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처음 누리고 있어요. 아직 지난 관성이 남아서 '내가 이래도 되나' '이런 호사를 누려도 돼?' 문득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때요. 난 이래도 괜찮아, 라며 더 이상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입장이 된 것을 즐기고 있어요.


야옹이처럼 기지개를 켜고, 유일하게 야구(자이언츠) 소식을 확인한 뒤 하루를 열어요. 어슬렁, 띄엄띄엄, 뒹굴뒹굴, 빈둥빈둥. 그리고 버스를 타고 걷고 눕고 자고 읽고 먹을 뿐. 그저 내키는 대로, 꼴리는 대로 그렇게. 시간 부자가 이런 것이구나, 느끼고 있어요.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인생의 낮잠이요, 삶의 휴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피로에 젖도록, 소진될 만큼 자신을 몰아붙였던 것을 반성하면서 말이죠.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 데 말이에요. 친구 집에 내 몸을 의탁하고 있어요. 친구는 저를 그냥 내버려두고 있어요. 그래서 무척 고마워요. 사실 친구 녀석은 바빠서 정신이 없어요. 모처럼 뉴욕 왔는데,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네요. 그게 외려 녀석이 바쁜 게 고마운 거 있죠?! 나도 녀석에게 아무 도움이 못되고 민폐 끼치고 있지만, 뭐 어때요. 우린 그래도 친구라서 좋은 데.


아, 뉴욕이 왜 그리 좋냐고요? 정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아마 뉴욕을 몰라서 그런 것도 있을 거예요. 나는 지금 뉴욕에서 일상을 살고 생활을 꾸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어쩌면 대책 없는 낭만을 품고 살아서인지도 모르고요. 뉴욕은 온통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이게 만들고, 가지고 싶은 걸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끔 해 준다는, 영화 <That Awkward Moment>의 대사처럼 말이죠. 가질 수 없지만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도시가 뉴욕인가 봐요.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뉴욕을 욕망하고 찾는 거겠죠?


저는 지금 존재가 한동안 뉴욕으로 이사를 온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해왔던 일을 마침내 결행하고 발을 내디디며 뚜벅뚜벅 걷고 있어요. 걷기의 길고 짧음을 떠나 어느 한동안 존재의 변화가 이뤄질 거예요. 뉴욕이기도 가능했던 변화도 느릿느릿 나타날지도 모르죠.



뉴욕에서 당신에게 보내는 첫 편지,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짝퉁 뉴요커의 허세(?)를 담아 라틴어를 읊조립니다.


Si vales bene, valeo(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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