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9시의커피] 카페 쿠바노와 쿠바노 코르타도를 마시며 Che를 떠올리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감정이다, 이런 자질이 없는 혁명가는 생각할 수 없다.” _ 체 게바라(Che Guevara)
진하다. 달콤하다. 알싸하다. 정신이 바짝 든다. 카페인이 몸 아래로 흘러가지 않고 뇌를 스치는 것 같다. 과장하자면, 카리브 해의 바람을 탄 파도가 심장을 덮친다. 쿠바의 뜨거운 심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카페 쿠바노(Cafe cubano). 한국 땅에선 한 번도 겪지 못한 혁명은 이런 맛과 향을 가진 것일까.
그것, 카페 쿠바노는 말하자면 ‘쿠바식 에스프레소’다. 밤9시의커피가 가을과 겨울을 관통하는 계절의 특정한 날들에 준비하는 커피다. 카리브 해의 해풍을 품은 진한 에스프레소에 설탕. 쿠바를 상징하는 두 물질이 만난 커피다. 10월 9일부터 밤9시의커피에 등장하는 이 커피를 손꼽아 기다리는 인민들도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일부러 0시를 기다리기도 한다. 누구보다 빨리 카페 쿠바노를 마시려고. 그런데 왜 10월 9일이냐고? 간단하다.
체 게바라(Che Guevara).
1967년 이날, 혁명가 Che가 피를 뿜었다. 혁명보다 진하고 뜨거운 그 피는 커피가 됐다. 권력에 취하기를 거부한 Che는 ‘다시,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혁명이 뿜은 진짜 피는 그렇게 권력과 힘을 경계한다는 것을 Che는 몸소 보여줬다. 그러나 Che의 혁명은 두 번의 매혹을 용납하지 않았나 보다. 물론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웠던 나라(의 정보국)가 Che를 가만 놔두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그리하여 카페 쿠바노에 밤9시의커피가 붙인 이름은 ‘벤세레모스(venceremos)’.
나무를 세공하는 노동자, 즉 목수인 경인 씨는 10월 9일 0시를 잊지 않고 문을 연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벤세레모스라고 외친다. 탄탄한 몸에 낮고 굵은 목소리를 지닌 그의 등장과 함께 울려 퍼지는 벤세레모스라는 ‘주술’을 듣자면, 언젠가 우리도 승리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벤세레모스의 뜻은 ‘우리는 승리하리라’는 스페인어다).
그가 왔다. 나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Che를 내리는 시간이니까. 혁명 품은 벤세레모스. 우리는 그렇게 왕의 목, 아버지의 목 한 번 제대로 내리치지 못한 이 땅의 로망을 술이 아닌 커피로 푼다. 그와 나는 그렇게 동지다. 지랄도 풍년인 세상, 이루지 못할지라도 영원히 품고만 있을지라도, 꿈 하나 정도는 가져야 하지 않겠나. 신기하게 또 한 명의 혁명 동지도 있다. 꽃집에서 플로리스트로 일하는 그녀 서인 씨. 작년부터 목수와 커피 노동자의 자정 혁명 회합에 동참하고 있다. 그녀가 올해는 감자 꽃을 들고 왔다. Che가 죽기 전, 감자밭을 바라봤다나 뭐라나. 믿거나 말거나.
2017년, 볼리비아에서 Che라는 혁명이 으스러진 지 50년이 됐다.
세 잔의 벤세레모스를 내렸다. 그녀가 향을 맡더니 취한 듯 말을 꺼낸다.
“10월, 참 좋은 계절이에요. 그런데 전 10월을 ‘詩月’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혁명이 스러진 계절이잖아요. 작정하고 붙잡지 않으면 쉬이 놓치고 마는 계절처럼 혁명도 마찬가지고요. Che는 詩라고 생각해요. 가능성만 영원히 봉인한 채 상상으로만 가능한 詩말이에요.”
미친. 혁명과 Che, 詩를 엮는 이 재주는 도대체 뭔가. 그러고선 그녀가 싱긋 웃으며 커피 잔을 든다. 서로 잔을 부딪치면서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벤세레모스. 우리 두 사람도 그 말을 따라 하며 커피 잔이 부딪친다.
이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이게 다다. 커피를 내리면서 詩를 떠올리는 일, 혁명이 미국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하는 일. Che의 죽음은 이듬해 68혁명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밤9시의커피에는 그런 시적 상상이 함께 담긴다. Che는 편지 끝부분에 늘 이렇게 썼다.
조국이 아니라면 죽음을 (Patria o muerte)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Venceremos).
_ 사령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Comendero Ernesto Che Guevara)
“아마도 그 승리라는 것, Che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을 알았던 건 아닐까요?! Che는 그럼에도 승리하리는 말을 건네고는 끝까지 싸웠을 거예요. 패배를 향한 숭고 같은 거죠. 서인 씨 말대로 Che는 그래서 詩가 맞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 숭고한 詩를 읊조리는 낭독자 같은 존재고. 하하.”
경인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관적 절망의 시적 정의를 담아 벤세레모스를 내린 것 아니겠나. 혁명의 피 같은 커피를. 사실 특별한 이날의 밤9시의커피 메뉴인 벤세레모스는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잡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가 1970년 인민연합 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캠페인 송으로 사용됐다. 아옌데는 그러나 1973년 미국 정부의 꼭두각시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로 9월 11일 목숨을 잃었다.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벤세레모스 커피에 늘 혁명의 피가 묻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런 詩月에 여기에 오면 커피와 혁명과 詩가 있어서 좋아요. 참 아름다운 계절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작년에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못 물어보고 1년을 참았어요. 아저씨는 어떻게 이런 커피를 선보일 생각을 했어요? 뭔가 분명 있는 것 같아. 그죠, 경인 씨?”
“그래요, 나도 궁금했는데 꾹 참았네. 언젠가는 얘기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말이죠.”
“하하. 듣고 놀리기 없기예요.”
그렇게 말을 꺼냈다. 가을, 10월과 詩월.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 그 이전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가을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 이후로도 매년 가을은 아름다웠고 다시는 오지 않을 유일한 가을을 매년 만났지만 그 가을 역시도 단 한 번이었다. 가능성은 영원히 봉인한 채 상상으로만 가능한 당신이라는 詩가 됐다. 그해 詩월, 당신이 왔고, 커피가 왔고, 詩가 왔고, 혁명이 갔다. 벤세레모스를 내릴 수밖에 이유. 그리고 이렇게 동지들이 생긴 것에 대한 기쁨도 말했다.
그리고 영화를 꺼냈다. 밤9시의커피는 어느덧 심야 영화관이 됐다. 뭐냐고 묻는데, 나는 말해주지 않고 보라고만하고는 영화를 틀었다. <체(CHE)>. 2008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만든 러닝타임 270분에 달하는 야심작. 그러나 한국에는 끝내 개봉하지 못하고 DVD로 직행한 <체>. 영화를 보면서 벤세레모스를 내렸고, 우리는 쿠바와 Che와 혁명 노동자들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혁명을 마셨다.
마침 이날 벤세레모스를 만든 커피는 크리스탈마운틴. Che가 매일 스무 잔씩 마셨다는 쿠바의 대표 커피다. 자메이카 바로 위에 자리한 쿠바. 북위 20∼23.5° 사이의 열대성 기후를 지닌 쿠바는 1748년부터 커피를 심었다. 콜럼버스는 쿠바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본 적이 없다”며 호들갑을 떨었다지. 크리스탈마운틴은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의 대용으로 쓰일 만큼 좋은 맛을 자랑했다. 감귤류의 부드러운 신맛과 카카오의 쓴맛, 입안에 오래 머무는 단맛이 조화를 이룬다. 벤세레모스의 진짜 맛은 그렇게 크리스탈마운틴이어야 가능하다. 물론 카페 쿠바노만 마시는 건 지겨울 수 있으니 별책 부록도 있다. 우유와 연유가 첨가된 쿠바노 코르타도. 라테에 비해 우유 비율이 낮고 연유가 우유의 풍미를 살려주면서 에스프레소의 맛을 여전하게 즐길 수 있다. 단맛 역시 빠지지 않고.
혁명은 달면서도 쓰다. 그러니 카페 쿠바노와 쿠바노 코르타도가 제격이다. 경인 씨와 서인 씨에게 물었다. 커피에 설탕을 넣어 마시기 시작한 건 언제일까요? 도리도리.
“커피에 설탕을 넣은 건 1715년경부터래요. 프랑스 루이 15세가 커피 맛을 높이려고 설탕을 넣었다는 설이 있어요. 뭐 루이 14세라는 말도 있어서 정확한 연도는 아리송하지만 18세기인 것 같아요. 물론 당시엔 정제당이 없을 때니 원당을 사용했겠죠. 커피에 설탕을 넣으면 쓴맛이 감소되고 단맛이 기운을 북돋는데 혁명은 커피와 설탕의 조합과 같은 맛 아닐까요?”
실은, 아무도 모른다. 언제 진짜 혁명을 겪어봤어야지. 촛불 혁명이라고 하지만, 인민이 진짜 주인이 됐다고 말하긴 빈틈이 많은 세상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날 밤새도록 어쩌면 더 이상 오지 않을 혁명에 대해, 사랑처럼 오염되고 무분별하게 남발되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으며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무수하게 많은 이야기 별을 땄다.
2012년 10월 세상을 떠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를 꺼내 혁명을 공부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가을밤에 결의한 것은 홉스봄이 자서전의 마지막에 건넨 말과 통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혁명의 새벽은 오지 않았고,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 몰라도, 만나지도 못한 혁명에게 이별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혁명과 만날 날을 포기할 수도 없다. 그것이 언젠가 올 혁명에 대한 예의다. Che는 ‘인간애’와 ‘자발적 노동’을 강조했다. 화폐와 욕망을 근간으로 삼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동기가 필요하다
는 뜻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보는 건 어떠냐고 의기투합하면서 맥주와 카페 쿠바노를 섞어서 ‘에스프레소 콘비라’를 들이켰다. 커피에 취하고 맥주에 취기를 느끼면서 혁명을 안주 삼았다. 겨울이 오면 1월 1일 다시 회합을 갖기로 했다. 쿠바의 혁명기념일. 홈스봄이 격하게 아꼈던 빌리 홀리데이의 재즈 선율이 BGM으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詩월의 가을밤, 빌리데이의 선율이 온몸을 감싼다. <The Man I Love> <I Cried for You>...
“아 詩월, 좋다. 우리끼리 혁명의 계절이네요. 하하. Che도 없고 홉스봄도 없고, ‘대가의 시대’는 이제 끝난 것 같아요. 그런 마당에 재즈라도 있어야죠. 빌리데이의 재즈가 혁명처럼 지독하고 진하고 슬프지만 이런 커피와 함께라면, 이 서늘한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알 수 있을 거 같아요. 자자, 우리 함께 벤세레모스.”
그렇게 가을과 겨울, 혁명을 생각하기 좋은 날. 그리하여 우리는 니체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는 것으로 짧은 혁명의 밤을 보냈다. 날이 밝아오고 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_ 프리드리히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