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9시의커피] 세계여성의날에 생각하는 빵과 장미, 그리고 커피
‘워샹니(我想你, 보고 싶어)’
_영화 <호우시절>, 동하(정우성)가 메이(고원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아저씨,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들에게> 읽어봤어요?”
밤9시의커피 단골인 양양이 물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다.
“네, 봤어요.” 이 책에 의하면, 남자는 한없이 지질한 존재다. 시쳇말로 ‘노답’. 나는 말을 이었다. “남자라는 말도 사치 같더라고요. 수컷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하하.”
양양이 폭소를 터뜨린다. “아저씨도 그럼 수컷이에요?”
“음, 글쎄요. 남성 우월주의가 판을 치는 땅에서 교육받고 자라다 보니, 마냥 자유로울 순 없겠죠. 다만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B급 마초 정도?” 물론 지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겠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남자는 개개의 존재가 아닌 사회적 구조와 존재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푸념 같지만, 사실 한국에서 여자로 사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에요. 아저씨는 실감할 수 없겠지만, 정말 그래요.” 맞다. 남자인 내가 봐도 그렇다. 남자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들도 여자에겐 다르게 다가온다. 단적인 예로 혼자 사는 남자와 혼자 사는 여자의 일상은 극명하게 다르다. 가령 배달 음식을 시켜도 집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꾸며야 한다. 몰래카메라의 피해자도 100% 여성이다. 일상적인 불안과 위협에 시달리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여성들의 현실.
《인간 종말 리포트》 《시녀 이야기》 등을 쓴 소설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는 이렇게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 봐 두려워한다.”
양양이 말을 이었다. “메릴 스트립 등이 나온 <서프러제트>라는 영화 보셨어요?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운동이 벌어졌던 20세기 초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요. 이 영화에서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모드 와츠가 처한 현실이 참담해요. 남성보다 세 배의 일을 하고도 그보다 적은 급여를 받고, 상사가 강압적인 지시와 성추행을 일삼지만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어요. 화상으로 어깨와 팔이 얼룩덜룩해지도록 일을 하고 가정을 돌봐야 하는 건 여성의 몫이에요. 보다가 천불이 났어요. 정말이지.”
나도 커피 한잔을 들이켰다. 그 양양의 천불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에구,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20세기 초반의 상황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21세기는 아직 오지 않은 건 아닐까요?”
봄, 빵과 장미의 나날
봄이 왔다.
그리고 봄과 함께 오는 것들이 있다. 어제도 그랬다. 3월 7일의 내음은 알싸했다. 안개 내음 덕분이었다. 봄 안개의 밤. 흡~, 하고 이른 봄밤을 들이켰다. 그 내음 덕분에 나는 봄이 될 수 있었다. 봄이 밤이었고, 밤이 봄이었다. 그 안개가 봄밤을 몽환적으로 만들었는데, 타이밍이 절묘했다. 기형도의 밤이었기 때문이다.
1989년 3월 7일, 세상에 작별을 고했던 기형도. 그를 추모하기 위해 밤9시의커피에 모인 이들과 함께 그의 詩, 「안개」를 읊었다. 슬프고 참담한 현실의 메타포.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江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空氣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植物들, 工場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寄宿舍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三輪車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
아침저녁으로 샛江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邑의 名物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株式을 가지고 있다.
女工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工場으로 간다
어제 함께하지 못한 양양이 3월 8일 오늘, 찾아왔다. 3.8 세계 여성의 날.
1908년 뉴욕 루트커스 광장에는 1만 5000여 명의 여성들이 모였다.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불타 숨진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하루 12~14시간씩 일함에도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비참. 들고일어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정치적 평등권 쟁취, 노동조합 결성, 임금 인상, 10시간 노동제와 작업환경 개선, 참정권 등 모든 요구는 정당했다.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받았던 노예 생활. 불공정과 불평등이 늘 문제다. 희한하게도 기형도의 「안개」와 맞물린다. 비참과 슬픔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비참과 슬픔이 어디에나 있다손, 그것이 결코 바뀌지 않을 천부의 것이라고 내버려둘 순 없지 않은가. 오늘, 밤9시의커피가 장미를 준비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함께 세상을 바꿔나갈 여성들에게 건네는 조공(?). 우리는 불순해야 한다. 프랑스의 국가(國歌)이자 혁명 노래였던 ‘라 마르세예즈’를 커피하우스의 배경음악으로 튼 것도 그런 이유였다. “불순한 피가 우리의 땅을 적시게 하라(qu'un sang impur abreuve nos sillons).”
“아저씨는 의외로 센스가 좋아요. 오늘 같은 날, 장미라니. 이러니 내가 이곳에 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안다. 여성은 남성과 다르다. 들고일어나도, 무식한 수컷(!)들처럼 총부터 들지 않는다. 빵과 장미다. 빵은 생존권이며, 장미는 인간의 존엄과 인권이다. 그것을 알아주는 양양은 우리 커피하우스의 단골이다. 근사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런 여성에게 조공하는 것은 또 얼마나 기쁘고 기꺼운 일인가.
봄비 같은 커피 한 잔
마침 봄비가 내리고 있다. 양양에게 건넬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이 봄비 내음과 섞인다. 커피가 부추기는 혁명의 결정적 순간을 떠올렸다. 커피는 영국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의 촉매제 역할을 한 뒤 프랑스 파리에 상륙했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검은 휘발유가 됐다. 러시아 혁명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 역시 커피하우스에서 계몽사상이 전파됐다. 커피의 보급이 어쩌면 필연처럼 혁명을 부른 것은 아닐까. 커피는 어느 시절, 혁명의 음료였다. 커피를 마시고 사람이 모이는 커피하우스는 혁명의 깃발이 올라간 봉기의 장소였다. 그러고 보니, 3월 8일은 러시아 2월 혁명(1917,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 기준으로 3월 일어났지만, 당시 러시아가 쓰고 있던 율리우스력으로 2월이어서 2월 혁명으로 불린다)의 날이기도 하다.
“양양, 그거 알아요? 커피가 조금씩 대중화되는 시기에 운명처럼 계몽사상이 싹텄어요.”
양양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진짜요? 커피가 촛불 같은 거였네요. 빵과 장미와 커피, 이렇게 조합하면 참 좋겠다.”
듣고 보니 그랬다. 커피는 정신의 함양이다. “그거 좋네요. 우리 같은 커피 쟁이나 커피 애호가들은 그래서 ‘커피를 마시면서 담론을 나누고 형성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시대적 각성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하길 좋아하죠. 그래요, 기분이다. 오늘 커피는 혁명의 기운을 담아 무료예요.” “와, 그래도 돼요? 장미를 주는 것도 고마운 데, 커피까지. 역시 아저씨는 아주 가끔은 멋쟁이! 오늘 아저씨는 수컷이 아니라 남자인 것으로!!”
아마, 봄비가 부추겨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봄비 내음을 제대로 맡아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알싸한지. 봄비가 스멀스멀 코에 스며든다. 알알이 혈관을 타고 내려가 심장 부근에서 터지고야 마는 봄비 내음. 커피 향까지 스며들었으니 심장은 하트를 그리고야 만다. 나는 봄비 이후의 커피를 내렸다.
“오늘 내린 커피의 이름은 ‘호우시절’로 할게요. 영화 속 메이(고원원)가 동하(정우성)에게 이런 말을 해요. ‘꽃이 펴서 봄이 오는 걸까,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걸까?’ 나도 궁금해요. 봄비가 와서 좋은 걸까, 좋아서 봄비가 온 걸까?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리는 법이죠. 하하.”
오늘의 커피인 호우시절에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사라진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염원을 담아, 워샹니. 그리고 봄밤, 두보의 詩를 읊었다. 양양이 웃었다. 여성이 웃어야 좋은 세상이 오는 법이다. 암,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春夜喜雨(봄날 밤에 기쁜 비)
好 雨 知 時 節
當 春 乃 發 生
隨 風 潛 入 夜
潤 物 細 無 聲
野 徑 雲 俱 黑
江 船 火 燭 明
曉 看 紅 濕 處
花 重 錦 官 城
즐거운 비가 그 내릴 때를 알아
봄이 되면 내려 생을 피우는구나
바람 따라 밤에 살며시 내리니
세상을 소리 없이 촉촉하게 적시네
들길은 낮게 드리운 구름으로 어둡고
강 위에 배 불빛만 외로이 비치네
새벽녘 붉게 비가 적신 곳을 바라보면
금관성에 꽃들도 활짝 피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