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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Jan 02. 2019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

[I'm in New York⑤] <언페이스풀> 흔적을 따라가면서  

1년 전, 뉴욕에 두 번째 발을 디뎠다.
5년 여동안 나를 쏟아부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뉴욕을 만끽하겠다고 떠난 길이었다. 그전부터 뉴욕 타령을 했었다. 한 번 짧게 내디딘 뉴욕에 혹했기 때문도  있지만 그래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접 만든 회사에, 대표까지 한 사람이 그만둬고 그래도 되느냐고, 지금까지 이룬 것이 아깝지 않으냐고, 나이도 적지 않은데 괜찮겠느냐고 묻곤 했지만,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Why Not?" 그게 뭐라고. 회사가 뭐라고. 일이 뭐라고. 관계가 뭐라고.
모든 사회적 관계, 의무에 스위치를 끄고(물론 한시적이었지만) 두서없이 맥락 없이 허허실실 뉴욕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게 당시 내 마음이었다. 다시 나는 한국에 돌아와 그 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뉴욕에 가서는 내 멋대로 뉴욕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다. 비록 몸이 태어난 곳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마음이 태어난 곳을 고향으로 삼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나는 뉴욕을 고향으로 못 박았다.
나는 여전히, 뉴욕을 그리고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에 젖어있다.  


우연이지만,
뉴욕으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골랐던 첫 영화는 <Paris can wait>(한국 개봉명 <파리로 가는 길>)이었어요. 작은 화면인 데다 눈꺼풀이 무거워 자다 깨다 반복하면서 봤어요. 그냥 무시할 수 있었지만 순전히 다이안 레인 때문에 본 거죠.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80년대 꼬맹이 시절, 제겐 여신 2명이 있었는데, 제니퍼 코넬리(<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다이안 레인(<아웃사이더> <카튼 클럽>)이었습니다. 저렇게 예쁠 수가 있나, 그저 흠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던 시절이었죠.


그러다 두 사람 모두,
생각보다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과거의 이름으로만 봉인돼 있던 어느 날. 다이안 레인이 다시 등장했어요. <언페이스풀>. (제니퍼 코넬리도 비슷한 경우였죠. 그이를 다시 눈여겨본 것은 <뷰티풀 마인드>.)


우와,
다시 만난 다이안은 더 아름다웠습니다. <언페이스풀>에서 다이안은 농익을 대로 농익은 여인으로 돌아온 거 있죠? 감독이 애드리안 라인. 고딩 시절, FM 몰래 숨죽여 봤던 <나인 하프 위크>의 그 감독. <언페이스풀>은 오프닝 신부터 숨이 턱 막혔다죠. 엄청난 바람이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날, 쇼핑 나왔던 코니(다이안 레인)의 치마가 바람에 훌러덩. 어머나@.@.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드러냈던 장면부터 인상적이었어요. 코니는 젊은 남자 폴(올리비에 마르티네즈)과 부딪히면서 다친 상처 때문에 근처 폴의 집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죠. 그러면서 폴에게 빠져들게 되고, 'unfaithful'하게 되는 영화.

<언페이스풀>, 강풍이 불고 코니가 폴을 만났다


소호를 어슬렁어슬렁 거닐다 그 집을 만났어요.
머서 가에 자리한, 영화 속 건물에서 리모델링이 된 집이었어요. 영화에서 만난 강풍 따윈 없이 화사하게 밝은 날,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저는 잠시 그 건물 아래 계단에 머물렀어요.


이왕 발걸음이 들어선 소호, 마음의 바람을 따라 걸었습니다.
역시나, 애드리안 라인의 또 다른 흔적이 있습니다. <나인 하프 위크(9 1/2)>. 관능의 화신 킴 베이싱어와 슈퍼 꽃미남 시절 미키 루크가 주연했던 영화. 기억하죠?!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끝내주게) 야하다'는 입소문에 이 영화에 대한 까까머리들의 호기심 게이지가 '만랩'에 달했었죠. 비디오테이프를 구하려고 갖은 애를 쓰던 당시 우리네 '짐승들'의 몸부림이 선하네요. 하하. (영국 <더 선>은 독자 설문 조사를 통해 '할리우드 사상 가장 뜨거운 섹스신'을 뽑았고 <나인 하프 위크>의 섹스신이 선정됐다지요. 참 별 걸 다.^^;)


여하튼 킴 베이싱어가 연기했던 엘리자베스가 일했던 아트 갤러리가 <언페이스풀>의 남자주인공 폴의 집 근처였어요. 스프링(Spring) 스트리트에 자리한 101번지 건물. 주철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여전히 독특해요. 19세기에 지어진 주철 건축물로서 뉴욕 시가 소호를 '주철 사적 지역'으로 지정한 덕분에 여전히 그 틀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뭔가 고전적이죠. 바닥도 다른 곳과 달리 돌로 포장된 '벨지언 블록'인데, 분위기가 참 독특하죠?


아, 오해하진 마세요. 이 근방이 애드리안 라인만의 퇴폐미와 관능미가 장악한 공간은 아니었어요. <사랑과 영혼(Ghost)>, 기억하죠? 몰리(데미 무어)와 샘(패트릭 스웨이지)의 사랑이 꽃 피는 집도 있었어요. "오~♪ 마이 러브, 마이 달링~♬ (언체인드 멜로디) 노래가 나올라치면 자연스레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도자기를 빚는 그 장면을 빚은 곳이에요. 그만큼 소호라는 공간과 건물이 주는 독특하고 근사한 '삘'이 있었던 거죠. 주철 사적 지역이 허투루 지정된 것이 아닐 거예요.

하지만 지금의 소호는 영화 속 풍경들이 많이 지워진 것 같아요. 소호를 누비면서 독특한 기운을 불어넣던 예술가들이 자신이 만든 성취 덕분에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다른 곳으로 밀려났어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둥지내몰림)이죠. 대신 이 고상한 취향을 상업적 기회로 본 비싼 쇼핑 매장들이 이곳을 장악했어요. 실제로 쇼핑백 하나둘씩 든 사람들이 이곳을 누비고 있었어요.

 

어쩌면 지금 소호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놓고,

누군가는 'unfaithful(외도를 하는, 불성실한)'이라는 말을 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공간도 변화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겠죠. 저는 뉴욕이 여전히 신기한 이방인이자 뚜벅이로서 어떤 것이 맞는지 알 수는 없어요. 또 어떤 바람(강풍)이 불어서 코니(다이안 레인)처럼 소호를 새로운 운명에 빠져들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죠. 제가 본 소호도 전부일 수도 없고요, 극히 사소하고 작은 부분에 불과하니, 저는 당신이 소호를 찾을 때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지가 궁금해요.

그렇게 거닐다 코니와 폴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이스트빌리지 시네마도 마주쳤어요. 두 사람, 이 극장에서 영화는 혼자 돌게 놔두고 뜨거운 밀회를 나눴더랬죠. 러브러브. 만약 이곳에서 <언페이스풀>을 상영했다면 거침없이 표를 끊고 들어갔을 거예요. 그들의 밀회를 훔쳐보려는 듯. 상상 속 '피핑 탐'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죠.


사소한 여담이 있어요.

폴에게 스며든 코니는 그가 미치게 보고 싶어 직진합니다. 폴의 집을 향하는 과정에서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 등장해요. 저도 이곳을 들렀는데, 마침 가는 길에 손을 꼬옥 잡은 어르신 커플이 제 앞에 있더라고요. 물론 그들이 부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떠나 맞잡은 두 손만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사랑은,

낯선 이도 금세 알아차릴 정도로 힘도 세고 자기장이 퍼진다는 것을. 제가 그이들의 자기장을 느꼈거든요. 그 자기장에 이끌려 사진을 찍었어요.


다시 돌아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이토록 유장하고 아름다운 터미널이라니요. 입이 떠억 벌어졌습니다. 1913년 만들어져 100년 이상 사람들의 이동을 담당했대요.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인데, 건축적으로나 공학적으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에서도 이 터미널은 하나의 예술 작품입니다.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하늘과 별자리는 경탄을 자아냈어요.


아마도 폴을 향해 달려가는 코니에게 그랜드 센트럴은 그저 기능에 불과했겠지만요. 사랑은 그렇게 다른 모든 것을 기능적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누비다 보니 <언페이스풀>을 다시 보고 싶어 졌어요.

이 영화를 본 사람 중에는 코니를 향해 '더러운 여자'니 '불륜녀'니 낙인부터 찍고 욕을 하는 이도 있어요. 에드워드(리처드 기어)와 코니의 관계나 각자 처한 사회적 조건에 대한 사유 없이 무조건 매도하고 욕부터 꺼내는 이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지만, 그들에게 "니(주둥이)가 불륜이다"라고 한마디 속삭여주면서 이 말을 건네고 싶어요.


"제도 밖의 사랑이 불륜이라면 사랑 없는 제도 또한 불륜이다. 결혼의 첫 번째 조건이 사랑이 아님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불륜의 사회가 불륜을 비난하는 풍경은 우습고 가련하다. 타인의 불륜보다 사랑을 잊어버린 나를 먼저 슬퍼할 것." (김규항,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그렇게,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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