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비로소 삶

퇴원 24일 차

by 박종옥




통깁스를 풀던 날, 시간이 잠시 멈춘 것만 같았다. 남편의 손에 기대어 오랜만에 두 발로 땅을 디디는 순간, 발끝에서 전해지는 가벼움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삶이 다시 시작됨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평범한 걸음이 이토록 벅찰 줄이야. 기념으로 예전에 들렀던 통영의 카페로 향하는 가파른 길도, 목발 없이 두 발로 디딜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힘이 났다. 커피 한 모금, 티라미수 한 입 속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오랜 멈춤 끝에 맞이한 삶의 환희였다.


그날 밤, 오랜만에 마신 커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억지로 눈을 감고 명상 영상을 켰다. 고요한 목소리가 파도처럼 스며들자,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햇살에 널린 천처럼 가벼워졌다. 그제야 오랫동안 앞만 보고 달렸던 시간, 멈춰서 자신을 보살피지 못했던 지난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육체는 정직했다. 참지 말라는 경고, 건강이 먼저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냈다. 아픔은 벌이 아니라, 나를 살리려는 몸의 절규였다. 20%도 채 남지 않은 인대로 꾸역꾸역 이어가던 삶이, 또 한 번의 삐끗임으로 강제로 멈춰 섰다. 발목은 더는 버티지 못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결국 수술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길로 이끌었다. 미룰 수도, 회피할 수도 없도록, 몸은 단호하게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모든 고통은 자신을 깨우기 위한 몸의 언어였음을.


돌이켜보니, 회사일을 위해 건강을 뒤로 미룬 순간들이 떠올랐다. 발목 통증이 심했지만 중요한 교육 워크숍과 회의 일정 때문에 병원을 몇 번이나 미뤘고, 어깨 통증에도 출장과 출근길을 감행했다. 교육안을 밤새 다듬고, 동료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마음에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회사 일정이 먼저라는 생각에 몸이 보내는 경고를 외면했지만, 결국 마지막 남은 인대가 파열되고서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열정적으로 달려온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달려왔음에도, 돌보지 않은 몸과 마음은 결국 한계를 드러냈다. 이제 분명히 안다. 일에 몰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신을 살피고 건강을 지키는 일이 근본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두 발로 땅을 디디는 순간, 삶의 균형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무시해 온 몸과 마음이 보내온 신호를 비로소 받아들였다. 이제는 건강과 나를 먼저 돌보는 삶을 선택하리라. 그 선택 속에서 느낀 환희와 평온만으로도 충분했다. 발목이 보내온 경고, 참아왔던 몸의 외침, 그 모든 것이 결국 삶을 다시 세우는 계단이 되었다. 멈춤을 통해 깨달은 소중함이, 앞으로의 하루하루를 더 단단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줄 것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