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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옥 Sep 30. 2021

떠나요 가을 속으로

『걷기의 인문학』

지구를 통틀어 대부분의 지역에서 산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이어주는 문턱 같은 곳, 영혼의 세계로 이어지는 곳이라고 간주되어 왔고, 그러면서 성스러운 의미들과 연결되어 왔다. 영혼의 세계는 공포를 안겨주는 경우는 있지만 악하고 해로운 경우는 거의 없다.

『걷기의 인문학』








꽉 조여진 일상을 살다 잠깐의 휴식이 생긴 연휴다. 시간이 나면 가장 먼저 "어느 산으로 떠날까?"를 고민한다. 가을을 만끽하기 위해 억새가 아름다운 재약산으로 떠나기로 했다. 떠나기 전부터 영남알프스 산군 중 하나로 사자평 억새와 습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가을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가방을 다.



절기의 차이를 온몸으로 확인하듯 바람의 숨결과 햇살의 온도가 어제와 확연히 다르다. 마치 누군가 칼로 베어놓은 듯한 계절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며 재약산에 첫 발을 디뎠다. 한참을 올라가자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뒤로 시원하게 내리꽂히는 물소리가 들렸다. 물소리가 우렁찬 걸 보니 제법 높은 폭포겠구나 짐작하면서 만난 흑룡폭포다. "캬!" 흑룡폭포를 첫 대면하면서 뱉어낸 감탄사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기둥을 타고 승천하는 흑룡을 닮았다는 흑룡폭포의 장관에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계단을 오르면서 힘들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씻겨나갔다. 상상만으로는 그려지지 않던 모습에 반해 기쁨을 맘껏 드러냈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 경관 덕분에 힘들어도 꾸역꾸역 산을 오른다. 산을 오르지 않았다면 보지 못할 풍경이다.





흑룡폭포를 뒤로하고 다시 산을 오르자 흑룡폭포와 다른 매력을 가진 층층폭포가 나타났다. 뻥 뚫린 하늘에서 물 폭포를 쏴준 것 마냥 연신 물이 쏟아지는 폭포다. 이 깊은 산속 어디에 물이 숨겨져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마치 누군가 물탱크의 수도꼭지를 끊임없이 틀어주지 않나 싶다. 고개를 들어 폭포 위를 올려다보지만 떨어지는 물줄기만 보일 뿐이라 그 신비로움이 더 컸다.



멋진 풍광을 놓치고 싶지 않아 자리를 깔고 앉았다. 커피와 빵을 꺼내 먹으면서도 눈은 연신 쏟아지는 물줄기에 빠져들었다. 캠핑족에게 불멍이 있듯이 등산가에겐 물멍이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것도 잠시 폭포 속에 침묵했다. 떨어지는 물줄기와 폭포 소리 외 그 어떤 것도 끼어들 틈새가 없었다. 무념무상의 감정을 안고 우린 억새가 아름다운 사자평 습지로 향했다. 드넓게 펼쳐진 억새밭을 상상하며 끝없이 놓인 계단에 발을 올렸다.





산이 계단으로 이뤄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사자평 분지가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오르던 힘겨움도 잠시 억새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이 빨라졌다. 기대에 잔뜩 부풀었던 마음이 일순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탈해졌다. 천성산의 드넓은 억새밭에서 느꼈던 경험으로 은연중에 천성산 같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억새밭이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아 실망했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마음으로 다시 사자평 안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신기한 건 발을 옮길 때마다 억새밭이 더 넓어진다는 점이다. 처음 눈을 돌려 만났던 억새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사자평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알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억새밭을 다 가지 못하고 중간에 발을 되돌릴 정도였다.





억새 군락지에 접어들면서 흘러나오는 감탄사에 자주 멈췄다. 끝없이 펼쳐지는 억새가 햇빛에 반사되어 뿜어내는 풍경이 장관이다. 역광으로 비치는 햇빛에 반사되어 억새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눈부신 흰 눈 같다 생각했다. 부드러운 가을바람에 억새가 머릿결을 흔들며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대답하지 못하고 "행복해." 단어만 연신 뱉어냈다.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행복해'라는 단어는 억새의 풍경을 표현할 말을 찾아내지 못한 채 뱉어낸 말이다.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못한 궁색한 언어가 한스러웠지만 마음만은 행복감에 터질 지경이었다.





억새에 홀려 걸어왔던 길만 보다가 다시 보지 못할 풍경이 아쉬워 뒤돌아 보면 여지없이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드넓게 펼쳐진 억새가 햇빛에 반사되어 흰 눈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끌린 듯 카메라 스위치를 연신 눌렀다. 찰칵찰칵 사진 찍는 소리가 조용한 억새밭에 퍼졌다. 마치 태엽 감는 인형처럼 카메라 버튼에 손이 갔다. 이런 날 보며 그는

"이러다 사진 수백 장은 찍겠다."라며 놀렸다.

앞서가던 그가 사라졌다가 보이길 반복했지만 여전히 사진 찍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지? 이건 아름다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억새에 흠뻑 빠진 채 방언처럼 터진 말들이 흩어져 앞서가는 그에게 닿았는지 그가 자주 멈춰 나를 기다렸다. 신이 난 발걸음을 뗄 때마다 통통 소리가 났다. "그냥 가면 어떡해요." 통통 발을 뗄 때마다 울리는 소리에 기꺼이 답해주면서 '자꾸만자꾸만'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지 않는 건 유죄다.





억새를 찍으며 놓친 가을 하늘이 카메라 렌즈에 들어왔다. 억새와 함께 들어온 하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누군가 사랑할 때 얼마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하늘만큼이라는 말을 할 때의 기분이랄까? 마음을 다하지 못한 표현력을 한탄하면서 하늘빛이 그대로 쏟아지는 억새를 찍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찍고 또 찍었다. 이 순간, 그 어떤 것도 아닌 억새를 푸른 하늘을 재약산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떠나지 않으면, 만나지 않으면, 겪지 않으면 모르는 게 많다. 사진을 보면서 아무리 아름답다 찬탄해도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를 아름다움이 있다. 돌아오는 길 아무리 사진 기술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억새밭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해 끝내 아쉬웠다. 눈으로 만난 풍경이 아름다워 연신 카메라 스위치를 눌렀지만 막상 사진을 펼쳐보면 10분의 1도 안 되는 풍경이 담길 뿐이다. 그렇다고 표현력이 뛰어나 마음속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또한 한계에 부딪혀 또 아쉬웠다. '어떻게 하면 이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용을 써도 능력 밖이다.





"산이 그렇게 좋아?"

라고 묻는 그대에게 떠나야만 알 수 있는 풍경이라 답할 수밖에 없는 막막함이다. 그러니 행여 사진과 글로도 재약산 억새에 빠져들지 못했다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꼭 한번 억새 군락지를 다녀오길 당부한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평일이라면 더더욱 좋다. 사람이 없는 시기에 산을 다녀왔기에 망중한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억새밭 모두가 내 것인 양 맘껏 찬탄하면서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을 방언처럼 터트렸던 것도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행여, 삶이 지루하거나 일상의 번거로움에 지쳐있다면 떠나시라. 그대여! 모자와 운동화 가방이면 충분한 가을이다. 하늘이 티 없이 맑고 햇빛에 영근 가을이 성큼 당신 앞에 와 있으니 그대는 그곳으로 떠나면 된다. 단, 평일 하루였음 한다. 사람이 많지 않은 평일이길 간곡히 당부한다. 조용해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억새 군락지다.





햇빛에 부서지는 빛의 감상도, 바람에 부스스 흔들리는 억새 소리도, 억새 너머 파아란 하늘을 맘껏 음미하는 일도, 풀벌레 소리도, 아무도 없는 억새숲에 빠져 침묵을 즐기는 일도 사람이 없어야 가능하니


"그대, 하루쯤 일상을 비워 그대에게 가을을 선물 하시라."






표충사


"빡빡하고 촘촘한 세상에는 여백이 필요합니다. 여백은 빡빡한 세상에 빈 공간을 창출해서 새로운 무늬를 그리게 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내게 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지요. 그곳에서는 죽은 나무가 되살아납니다.
『예술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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