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수용 시설에 수용된 많은 장애인이 소위 '시설병'을 앓는다. 시설병이란 장기간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에게 나타나는 일종의 무기력증이다. 전반적으로 삶의 의욕(힘에의 의지) 자체가 꺾여, 끔찍한 폭력을 당하고도 저항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시설에서 나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중략) 폭행이 만들어낸 무기력만큼이나 연민과 동정이 만들어낸 무기력도 크게 작용한다. 어떤 점에서 연민과 동정 자체가 삶에 대한 폭력이다. 연민과 동정은 '세련된 경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연민 대상의 '포기된 삶'을 영속화하면서 예속을 더욱 심화하기 때문이다.
『다이너마이트 니체』
넷플릭스의 K 콘텐츠가 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에 출시된 <오징어 게임>이 세계 시청률 1위를 차지한 뒤이어 출시된 <지옥>이 하루 만에 전 세계 드라마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처음 <오징어 게임>을 보게 된 것도 우리나라 드라마가 세계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과 <오징어 게임>을 모르면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로 대세였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은 휴일 하루를 몽땅 투자해 정주행 할 만큼 흡입력이 있었다. 잔인성에 고개를 젓기도 했지만 생각거리를 던져준 드라마였다.
뒤이어 나온 <지옥> 또한 마찬가지다. 주위의 평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넷플리스에 접속해 이틀을 할애해 시청을 완료했다. "지옥은 예고 없이 등장한 지옥의 사자들에게 사람들이 지옥행 선고를 받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하고, 이 혼란을 틈타 부흥한 종교단체 새진리회와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이들이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네이버)다. 마지막 6회를 보고 나서 끙 소리와 함께 감탄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심리, 신, 종교,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면서 며칠 전 읽었던 『다이너마이트 니체』를 꺼내 들었다.
<지옥>을 보기 전 『다이너마이트 니체』를 독서모임에서 진행했다. 『다이너마이트 니체』는 니체의 사상을 쉽게 풀어놓은 고병권 작가의 책이다. 우린 6시간을 함께 하면서 책 구절을 읽어내며 향유하는 지식에 고양되는 기쁨을 나눴다. 책 내용 중 인상 깊었던 종교 관련 부분 이야기를 나눴던 터라 <지옥>을 보면서 종교가 인간에게 파고드는 심리가 궁금했다. 니체는 "종교는 사람들의 낙담과 무기력, 자신과 세상을 향한 저주 등을 모두 고상한 인간의 품성, 저 세계(천국)로 구원될 자질인 것처럼 포장해버렸다. 이처럼 삶의 욕망을 제거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고귀한 인간이 되는 길인 양 말하는 것을 니체는 "인간에게서 하나의 숭고한 기형아를 만들려는 의지"라고 비꼬았다."
'인간이 종교에 매달리는 이유가 뭘까?'를 고민한 적이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버거운 일이 발생하면 절대자의 힘을 간절히 원한다. 현실이 힘들수록 종교에 깊게 빠져들게 된다. 나약한 정신력으로 자신을 구원해 줄 절대자에게 의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신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맹신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로마 시대 기독교의 탄생은 완전히 이질적인 구원과의 탄생이었다. 로마를 지배했던 철학들은 한결같이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두려움, 특히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려 했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 철학자들이 걱정했던 것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금의 삶을 망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외적인 것의 영향 - 원한, 분노, 탐욕 등등 - 아래 자기 삶을 방치하지 말라고 했다. 외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 외적인 것에 예속될 필요 없는 주권적 삶, 이것이 그들이 생각한 '구원'이었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평생에 걸친 단련과 수련을 통해 얻는 자율적이고 주권적 삶이었지, 이승과 저승, 죄와 심판, 천국과 지옥, 불멸 같은 극적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p130)"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인간의 나약한 심리, 공포를 조장해 새로운 종교를 만든 '새진리회'의 교리를 믿는 건 두렵기 때문이다. 지옥행으로 인간의 두려움과 수치심을 자극하고 그걸 이용해 세력을 펼쳐가는 새진리회 같은 이들은 니체가 말하는 바울의 천재성과 비유된다. "바울의 천재성은 사람들의 원한과 복수심을 '구세주'와 결합시킨 데 있다. 바울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상징을 활용했다. 이 상징을 통해 구원을 원한과 복수, 불멸, 심판, 피안, 지옥 등의 장치와 결합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에게 피안의 세계를 상상하게 했으며, 영원한 처벌의 공포를 불어넣었다.(p131)"
'영원한 처벌의 공포'가 인간의 가장 나약한 심리를 건드린다. 현실이 힘들수록 영원함은 더욱 끌리는 단어다. 현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세상이 영원토록 반복된다면 끔찍한 일이다. 지옥이 주는 어마 무시한 상상력은 인간을 한없이 약하게 만든다. 지옥의 공포는 인간의 상상만으로 만들어졌기에 끝을 모르는 공포 수치다. 저승이 두려워 신을 믿기도 하니 말이다. 이처럼 인간의 나약한 부분을 건드려 만들어진 종교는 인간의 주인성을 뺏는다. 신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자의 말은 그러니 공포다. 공포를 조장해 신을 믿게 만드는 종교는 자율성에 반하는 행위다. 장애인들이 겪는 시설병처럼 시설을 나오면 두렵기 때문에 종교에 머무르며 우아한 폭력을 참아낸다. <지옥> 영화의 새진리회의 교도들과 같다. 그들은 부당하지만 두려워 끝까지 종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 또한 각자의 시설병에 걸려있는지 모른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깨는 게 두려워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새진리회를 믿는 이들은 자율성에 비롯된 믿음이 아니었다. 공포로 조장된 종교였다. "이승과 저승, 죄와 심판, 천국과 지옥, 불멸 같은 극적인 사건(p.130)"을 이용해 인간을 조정했을 뿐이다. 죽음을 선고받는 건 지옥에 갈 거라는 신의 계시이기에 죄 있는 자가 되어 낙인찍히는 두려움을 이용해 신도를 확장해 나갔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이 부당한 일임에도 끝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처벌의 공포 속에서 인간은 극히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가 되어버린다. 종교는 어쩌면 우리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건드려 종속하게 만드는 시설병 단체인지 모른다. "종교는 사람들의 낙담과 무기력, 자신과 세상을 향한 저주 등을 모두 고상한 인간의 품성, 저 세계(천국)로 구원될 자질인 것처럼 포장해 버렸다.(P.152)" 두려움 때문에 믿는 종교라면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한다며 드라마는 말을 걸었다. 옳다고 믿었던 신념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던질 시간이다. 지금은.
이상, 종교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특별한 종교를 지칭한 건 아니고 우리가 믿는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말 어줍잖는 개인의 생각을 니체라는 거대한 철학자에 붙여 글을 써서 민망하다. 다시 읽어 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