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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옥 Dec 20. 2021

산에 가지 마세요

『걷기의 인문학』

등산이란 소풍과 순례의 결합이라고 보는 게 제일 좋다는 생각을 나는 반세기 동안 홍보해왔다. 소풍-순례 같은 등산은 공격성은 적고 만족감은 크다. 자기가 올라갔던 데를 기록하지 않은 채로 긴 인생길 내내 가벼운 등산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연애 관계를 목록으로 기록할 수는 없지 않는가.
<두 발로 세상을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기 싫은 일 중 하나가 운동이다. 그럼에도 운동은 필수라 일주일 3번 걷기 목표를 세우고 워킹 패드를 구입했다. 처음 몇 달은 알람 설정까지 하며 열심이었다. 워킹 패드에 올라갈 일이 점점 줄어들 즈음 '2021년 유종의 미 100일 미션'이 시작되었다. 미션을 걷기로 선택했다. 함께하는 단톡방에 미션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워킹 패드에 올랐다.



걷기가 습관으로 자리 잡아갈 즈음 등산 중 발목을 삐었다. 다행히 발목이 붓거나 걷는데 큰 무리가 없었지만 쉽게 낫지 않았다. 안타까운 점은 발목이 삔 상태로 중간중간 걷기 미션을 진행하고 장장 6시간 이상 산을 탔다는 것이다. 무리해서 등산해서인지 발목 통증이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심해졌다.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들렀다. 그것도 한 달이나 뒤늦게. 의사 선생님은 발목이 낫기까지는 깁스를 하거나 걷지 말아야 하지만, 일상생활을 해야 하니 최대한 걷기를 자제하라는 처방을 내려주었다. '그렇다면 운동은? 등산은?' 순간 걷기 운동을 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등산을 못하겠구나 싶어 아찔했다. 의사 선생님께 간절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혹시, 조심해서 등산하면 안 되겠지요?"



"상처 부위를 자꾸 건드려 긁는다면 상처가 덧나겠죠? 발목도 마찬가지예요. 움직인다는 건 발목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에요. 그러니 최대한 움직이는 일을 자제해야 해요. 등산은 당분간 안 됩니다. 젊다고 몸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나이 들어 고생합니다."



그 와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젊다니?  마스크 쓰고 있어 모르시는구나.' 싶었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는데요."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꿀꺽 참았다. 마스크 덕분에 젊다는 소릴 들어 기분은 좋았지만 당분간 등산을 끊어야 한다는 말은 속상했다.



"조심해서 산을 탄다면 괜찮지 않나요?"



끝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사 선생님은 여지없이 안 된다며 고개 저었다. 약국에서 약을 타 오면서도 약을 먹으면서도 등산 금족령은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처럼 산에 가지 말라는 처방이 내려지자 산에 가고 싶음이 절실해졌다. 빼먹고 싶던 운동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아, 산으로 떠나고 싶다."


출퇴근 시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산 풍경을 보면서 뱉어낸 말이다. 떠나고 싶다고 말하자  단박에 겨울산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때부터 몽유병 환자처럼 주절거렸다.



'나뭇잎을 떨궈낸 겨울산은 햇살이 가득 내려앉아 따뜻하겠지. 수북이 쌓인 낙엽 밟는 재미는 어떻고? 때죽나무에서 먹이 사냥에 여념 없을 곤줄박이 공연도 다시 보고 싶은데. 낙엽 내음이 짙어진 산 향기에 취하고도 싶어. 쌀쌀한 바람이 부는 겨울산에서 마시던 따뜻한 커피는 끝내줬는데. 땀 흘리며 6시간 이상 걷고 나면 일상의 스트레스가 단박에 사라졌지. 덕분에 다시 일주일을 살 수 있었어. 각자 일상을 보내던 우리 부부가 등산으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시간이었고 말이야. 산을 타면서 밀린 강연도 들을 수 있었어. 당연하다 생각했던 등산을 할 수 없다니.... 이제 무슨 재미로 살지?'



수시로 오르지 못할 산이 떠올랐고 시시 때때로 구시렁거렸다. 심지어 거실 책장에서 발견한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제목을 <등산의 시대는 끝났다>로 읽혔다. 거실에 먼지 쌓인 채로 놓여 있는 워킹 패드가 이렇게 유혹적이라니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말이다.



'금단현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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