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수기에 꼭 물통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의 교체를 남성이 하냐 여성이 하냐는 실은 전혀 본질과는 관련이 없는 논의이다.
정수기와 물통은 결국 책임의 소재를 어떤 구성원이 질 것이냐 라는 논제에 대한 상징물에 불과하다.
일/책임/하는사람 (Task / Responsibility / Doer)이 모두 포함되어있으니 결국 회사일이 축소판이다.
나는 정수기의 물통이 비어있으면 직접 간다. 물을 마시러 탕비실까지 컵을 들고 왔는데, 정수기의 물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돌아서서 자리에 와 앉는 것이 내 기준에선 너무 멍청한 짓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선배들 중에는 즉각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경우도 있다. (주로 어린 남자 직원을 부른다)
같은 일(Task)을 할 때, 책임(Responsibility)을 어떻게 지느냐는 하는 사람(Doer)에 따라 다르다.
모든 회사 일이 그렇다.
물통을 가는 일이야 일정 수준 이상의 근력을 가지고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이 남자가 해야 하네, 여자가 해야 하네 라는 유명하지만 너무나 소모적인 논쟁을 혐오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정수기에 꼭 물통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물통을 뒤집어 꽂아서 사용하는 방식의 정수기만 있는가?
수도관을 연결하여 필터만 정기적으로 갈아주면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정수기가 나온 지 이미 10년도 더 되었다. 구식 정수기를 쓰는 이유는 결국 비용과 관리측면에서 '아끼려고'하는 관행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정수기 자체를 바꾸면 물통을 남자가 가네 여자가 가네 선배가 하네 후배가 하네라는 서로 의 상하기만 하는 논쟁 자체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혁신이 달리 있나? 아이폰만 혁신이 아니라, 이런 정수기 자체를 바꿔버리는 액션이 혁신이다.
나는 정수기 물통을 갈아달라고 몇 번이고 나를 불러대는 선배를 보며 생각했다.
처음에야 '지가 좀 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왜 물통을 갈 필요도 없는 정수기를 들여놓지 않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93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입사 이후로 정수기와 물통에 관련해서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
차장, 부장이면서 직접 물통을 가는 것을 마치 전장의 나이팅게일처럼 숭고하고 대단한 일이라 여기는 자,
여전히 손가락 까딱 안 하고 멀리 있는 젊은 직원을 호출하는 자,
매번 십 수개의 물통을 고층에 실어 나르느라 몇 번이고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는 정수기업체 관련자,
아마 내가 입사하기 훨씬 이전부터, 10년이 됐을지 20년이 됐을지 모르지만,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변하지 않은 것이다. 아직까지도.
혹시나 당신이 누군가의 지시로 일하다 말고 끌려 나와 정수기 물통을 갈아본 적이 있다면,
혹은 누군가를 시켜보려고 한 적이 있다면, 생각해보라.
훨씬 근본적인 해결책을 위한 관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