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회사는 절대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곳이 아니지만, 민주주의를 입맛대로 활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나는 민주주의를 존중하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민주주의만큼 흉기로 돌변하는 체제는 잘 없다.
회사는 특히 관료주의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며, 1명의 CEO가 수천 명의 임직원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 민주주의라고는 결단코 말할 수가 없다. 애초에 CEO를 투표로 뽑지도 않는다.
여기서 열 받는 것은,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민주주의를 꽤 많이 들먹인다는 것이다.
임금 동결에 대한 결의안이라 하면서 대강당에 모아 앉혀놓고 나갈 때는 서명을 하라는 식으로 판을 짠다든가,
회식장소에 대한 투표를 하고, 맘에 들 때까지 재투표를 계속한다든가,
회의실에서 "이의 있는 사람?" 하면서 거수식 즉석 민주주의를 시전 한다든가,
이러한 식으로 다수의 동의를 강요하고 정당성을 억지로 부여하려는 모습을 어디서 보았던가?
북한이나 나치 독일에서 하던 짓이 딱 저것이다.
북한도 투표를 하긴 하며, 히틀러 또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인물이다. 민주주의가 도덕성이나 본연의 목적을 잃고 오로지 도구적인 기능만 수행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것은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러한 '뒤틀린 민주주의(Distorted Democracy; 실제 존재하는 용어는 아니다)'를 혐오한다.
"너희도 다 좋다고 그랬잖아"라는 말을 들으면서 매년 달라지지 않는 동결된 임금을 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나는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물론 회사에는 민주주의가 필요하지는 않다. 애초에 그런 조직이 아니다.
주식회사라면 지분을 많이 갖고 있는 대주주일수록 발언권이 클 것이며,
유한회사이거나 가족계 기업이면 오너 패밀리가 직책에 상관없이 결정권을 많이 가지기 마련이다.
회사는 말 그대로 잘만 돌아가면 된다. 돈을 쑥쑥 잘 벌어서 임직원들 모두가 임금을 잘 받아가거나,
아니면 직원 간의 화목함이나 시너지가 발현되면서 좋은 문화와 그에 수반되는 성과가 모두의 성취감으로 이어진다면, 민주주의건 CEO독재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효율"과 "생산성"이 기업의 제1 덕목 아니던가.
민주주의를 편리할 때에만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회사의 체계가 허술하며 효율이나 생산성을 이끌어낼 장치나 시스템이 부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90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직원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현대 사회에서 변화하는 세계 속에 살아남으려면 CEO나 소수의 경영진의 결단만으로는 어렵다. 한 명 한 명,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민주주의를 들먹이려는 태도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다.
"너도 좋다고 했잖아"라는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성추행범들의 단골 대사니까 말이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