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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박 May 04. 2020

퇴사 D-88 : 위기무새

13.

올해는 정말 위기여서, 경영위기이고 저성장이 예상되어서, 여러분의 임금을 동결하겠습니다.

입사하고 나서 5년 내내 계속해서 들었던 이야기다.

문제는 팀장이나 임원들이 "솔직히 내가 신입사원 때부터 하던 얘기다"라고 하는 것을 들어버린 것이다.


1990년생인 나는 2008년 이전은 잘 모른다.

2008년 금융위기도 고3이었던 시절이라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가계를 지탱하셨는지 섣불리 안다고 말할 수가 없다.

1997년 IMF 위기 때야, 초등학생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즉, 나는 정말 '위기'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재경부서에서 일했던 동기들이 매일같이 손익분석을 하고 분기별로 보고하고 대중에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회사를 지탱하기 위한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비즈니스란 경쟁으로 가득하다. 경제는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뜻밖의 사고나 정책적인 역풍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최근 무역전쟁이나 우한 코로나 사태 같은 뜻밖의 일을 겪으며 우리는 '위기'라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전례 없는 위기는 당연히 인정한다. 

그러나 매년 남발되는 '레토릭으로써의 위기'는 임직원들의 사기만 낮추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위기예요 위기는 아휴 바빠요 바빠 정도로 일터에서 자주 들리는 추임새와 같다.

양치기 소년의 일화처럼, 위기란 것도 한두 번이라야 긴장해서 더 열심히 일하거나 하게 만들지, 그것이 매년 반복되고 매 순간 강조되면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사람의 감각은 무뎌지게 된다. 


주가 보전, 신용등급 유지를 위해서 IR이나 실적 발표 때는 온갖 긍정적인 해석이나 실적 자랑을 하면서 (이를테면 '최대 매출 달성', '어려움 속에서도 이익률 상승'과도 같은),

내부 직원들에게는 '위기여서' '경영이 어려워서'라는 식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사람이라면 혐오감이 들기 마련이다.


아니, 잘했다면서? 선방했다면서? 근데 왜 안으로는 위기라고 외치는가! 분개할 수밖에 없다.

위기를 외치기만 하고 정말 생존과 발전을 위한 액션이 부족한 회사인가?

아니면 위기를 외치지만 잘 느껴지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보이는 회사인가?

어느 쪽이든 위기는 절대로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88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앵무새처럼 위기를 외쳐대기만 하는 위 기무 새만 있다면, 정말 극복은 누가 하는가?

위기가 사실이 아니어도 문제고, 얕은 위기여도 문제고, 제일 문제는 위기가 정말로 심각한 수준일 때 나타난다. 가라앉는 배에서 고장 난 경보벨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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