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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보고하는 데에 아직 결재판이 필요한 회사에서 일하는가?
그것 때문에 혹시 프린터기 앞에 줄을 서거나 결재판이 없어서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는가?
퇴사를 유발하는 회사 최상위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결재판의 형태는 다양하다. 까만 가죽을 두른 전통적인 형태의 결재판도 있고,
혹은 하드보드지나 플라스틱판을 활용한 결재판도 있다.
A4용지 매수가 부족하여 흐느적거리는 상태에서 글씨를 잘 쓸 수 없거나, 읽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면 플라스틱 체크리스트 보드를 쓰는 것은 나도 자주 하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러나 보고와 결재를 위해 결재판을 반드시 써야만 하는 문화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면,
솔직히 말해 21세기의 회사라고 말하기 어렵다.
결재판은 상징적인 존재다. 여전히 프린트물이 필요하며, 때문에 프린터기와 A4용지가 월간 수백만 원~수천만 원 단위로 소비되고, 면대면 보고일 것이기 때문에 상사의 자리나 방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문화를 가졌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면대면 보고가 필요하긴 하다. 중요한 일이나 기밀을 요하는 일, 전자메일이나 메신저를 통해 섣불리 주고받기에는 상당히 민감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라면, 출력을 하는 것까지 신랄하게 비판할 마음은 없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도대체 결재판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전자결재, 오피스 결재, 이메일을 통한 결재, 이제는 훨씬 간편하게 모바일이나 앱을 이용한 결재까지 다양하게 등장했으며, '4차 산업혁명'이나 '인공지능'까지 갈 것도 없이 기본적인 인터넷과 웹 보안 기술만 있다면 결재판이나 프린터가 더 이상 사무실에 남아있을 이유가 사라진다.
(전자결재를 얘기하느라 인공지능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AI에 대한 실례다)
따라서 결재판과 구식 보고문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결코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문화와 마인드가 구식이기 때문에 그 쉬운 결재판 없애기가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2018년경에 결재판 없애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내가 다니던 회사의 결재판은 검은색 가죽 형태가 아니라 흰색 하드보드지에 가벼운 코팅을 한 형태로, 잘 수거해서 재활용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있는 재질이었다.
지방 사업장도 아니고, 본사 한 건물의 결재판 수를 세어보니 그 수가 몇천 장에 이르렀다.
결재판 수거에도 반발이 따랐다. 결재판 없이 A4용지만 떨레떨레 들고 가서 보고하라는 것이냐? 결재판 품귀현상이 일어나서 막내 사원들만 고생할 것이다, 결재판은 예의범절을 나타내는 것이다 등등....
협조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적극적으로 반발해주니,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재판을 수거하여 아이들의 그림책이나 조형물에 활용하는 아티스트나 사업자분들께도 연락을 해놨는데,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드릴 수가 없었다. 그저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결재판은 늦으나 빠르나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더 이상은 주판을 두들기는 사람이 없어졌듯이,
아무리 그래도 손으로 보고서를 써서 상사에게 보고하는 사람이 없듯이,
결국에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마치 사극에서 나오는 상소문 받침대와 같은 존재니까
87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결재판을 2020년부터 없애기 시작했다. 경영지원본부가 나서서 없앤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2년 전 내가 열심히 결재판을 없애는 데에 동참해달라고 했을 때, 온갖 논리로 반발하고 방해하던 그룹이 그자들이니.... 화가 나지만, 세상일이 그런가 보다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