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박 May 07. 2020

퇴사 D-85 : 천하제일 바쁨대회

16.

노예들의 사슬 자랑 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길들여져 의식조차 노예화된 사람들은, 제 발에 묶인 쇠사들이 더 빛난다며 저들끼리 무의미한 경쟁을 한다는 뜻이다. (물론 출처가 확실한 말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말이다.)


내가 일하던 회사는 제조업 회사이며 언제나 공장 라인이 가동되고, 원료가 조달되고 제품이 운반되어 판매되어야 하는 전통적인 구조를 갖춘 곳이었다. 어느 톱니바퀴 하나라도 휴식보다는 근로가, 여유보다는 바쁨이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곳이었다.


즉, 바쁘다. 바쁜 사람이 정말 많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바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70명 남짓 한 동기들이 모여 단체 카카오톡 방을 만들었다. 신입사원 연수 중에야 서로를 알아가고 사진을 올리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그런 자연스러운 카톡방이자, '공지방'으로서의 기능까지 수행했다.

서로 힘든 신입사원 시절을 보내면서 동기 방은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각자의 사업장에서 공식 루트면 얻기 힘든 자료도 쉽게 입수하게 만드는 좋은 커뮤니케이션의 장이었다.

그러나 입사 이후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부터 이상한 현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바로 '천하제일 바쁨대회'가 개최된 것이다. 

연우가 말했다. "요새 너무 힘들다, 어제도 회식했다"

민아가 답한다. "나는 지난주에 세 번이나 회식했다. 게다가 우린 1시간 먼저 출근하라고 한다"

진태가 껴든다. "야, 나는 이번 달에 술을 안 마신 날이 없다. 새벽 6시에 출근하고 어젠 야근까지 했다."

윤아가 던진다. "좋겠다 너희들은, 난 출근한 날 퇴근하는 게 꿈인데.... 집에 언제 가본지 모르겠다."

석호가 말한다. "꿀 빠는 본사 애들이 말이 많네, 공장은 진짜 지옥이야 지옥"

...... 그렇게 결국 누군가가 "와 정말 힘들겠다, 힘내자 우리"라는 식으로 억지로 훈훈한 결말을 내고 끝내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이런 '바쁨자랑'이 이어진다.


정말이지 궁금하다. 이게 경쟁할 일인지. 한두 번쯤 얘기하는 것이야 물론 필요하다. 정말 힘들 테니까,

동기들의 위로를 받고 싶고, 또 사람이란 해결책이 없더라도 마음속의 힘듦이나 쌓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다. (그렇게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나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노예들의 사슬자랑' 아니, '사원들의 바쁨자랑'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은 절대로 건강한 문화가 형성된 곳이라고 할 수 없다. 


본인의 바쁨을 계속해서 어필하는 사람은 정말로 바쁜지 궁금해질 정도이다.

그렇게 바쁘면 사실 카톡을 붙잡고 있을 시간도 없는 것 아닌가? SNS는 또 왜 이리 활발한가.

바쁜 것이 컨셉질이 되어 본인의 이미지로 정착하는 것에 어떠한 메리트가 있는 것일까?

더 빛나 보일까? 더 헌신적이어서 멋져 보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차라리 그 빛남과 헌신을 조금은 포기하고 싶다. 정말 바쁜 사람은 스스로 어필하지 않아도 주변 동료들이 어차피 다 알 수밖에 없다.


85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100보 양보해서 앵무새처럼 바쁘다고 말하는 동료나 동기를 나는 100번이고 위로해줄 자신이 있다. 

각자만의 힘듦이 있는 법이니까. 내 눈에 꿀 빠는 것처럼 보여도, 본인이 힘들다면 힘든 것이다. 

즉, 힘들다는 어필이 남의 어려움을 "꿀 빤다"라는 식으로 까내리는 근거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기린은 목이 길어서 좋겠지만 물 마시는 것이 어렵고, 

하마는 수영을 잘해서 좋겠지만, 햇빛에 오래 서있는 것조차 어렵다.

사람은 오죽한가? 다면적인 존재이며, 인생은 프리즘과 같이 다양한 각도를 갖고 있다. 


혹시 회사의 분위기가, 당신들의 동기들이 '천하제일 바쁨대회'를 개최하였는가?

어서 수건을 던져라. 기권 선언을 해라. 우승해 보아야 아무것도 남지 않고 찝찝함과 상처만 남게 되는, 참가해서는 안 되는 대회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85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 D-86 : 카톡 감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