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채팅, 메신저, 카톡이 발달한 시대에도 역시 업무협조에는 '전화'가 빠질 수 없다.
문제는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 한 번에 맞춘다면 그것 자체로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이다.
처음 해보는 일이나 어려운 일은 돌고 도는 무한 전화루프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주로 동사무소나 공직자 사회에서 관료주의가 만연하고 뿌리를 깊게 내려버린다면,
"내 일 아니야, 나는 몰라"라는 마인드셋과 함께 마치 폭탄을 돌리듯 전화돌리기를 시작한다.
이런 일은 너무나 일상다반사에 비일비재한 일이라, 매일같이 새로운 사례가 등장한다.
가장 최근의 일은 2020년 올해에 일어난 (비교적 따끈따끈한) 일이다.
우리 회사의 특정 제품이 경쟁사와 비교해서 기술적으로 어떤 수준인지 알고 싶었다.
가격 데이터야 구독하는 매체나 신문기사에서 찾으면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제품 자체의 기술적 스펙이나 그것을 생산하는 설비의 수준, 그리고 영업망은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해서는 결국 현장에서 직접 그 일을 하는 '실무자'분들에게 문의하는 것이 필수불가결이다.
문제는 누구한테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직원 핸드폰번호는 쉽게 이름이나 부서명을 검색하면 입수할 수 있지만, 이 수백명의 사람들 가운데 내가 원하는 것을 알려주거나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사실상 굉장히 알기 어렵다.
메신저라는, 혹은 직원 검색창이라는 협소한 공간에 자신이 맡은 일을 구구절절 적지도 않을 뿐더러, 회사일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치 직무이력서나 경력사항을 쌓아올리듯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지도 않는다.
그저 간단하게
"OOO과장, 경영기획"이라든가, "DDD 책임연구원, XX제품 연구"라는 식으로 지극히 간략하게 표기되어있다.
어쩔 수 없다, 가장 키워드에 근접한 사람을 찝어서 메신저를 보낸다.
그리고, 대답이 늦어지면 결국 전화를 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화를 선호하지 않아서 그런지 메신저로 간략하게 해결이 가능하다면 먼저 그 방법부터 시도한다.)
자리에 당연히 당사자가 없을 수도 있다. 옆자리의 누군가가 소위 전화를 '당겨'받거나, 아니면 그 실무와 별로 관계 없는 하급자(주로 막내사원)가 전화를 받아 당황스러운 듯이 애써 나의 질문에 대응할 수도 있다.
나는 차라리 "그런 자료는 없다" "나는 모른다" "아쉽지만 보안상 알려줄 수 없다"라는 대답이 좋다.
일이 그 시점에서 종료될 수도 있고, 곧바로 내가 Plan B, C, 등 대안을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을 주어지게 하기 때문에 시원시원하고 명료하다.
정말로 골치아픈 것은 "아, 그것은 저희 A팀이 아니라 B팀에 문의하시면 될 것 같아요!"라는 대답이다.
이 경우 정말 B팀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알려줄 수 있지만, 무한 전화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출발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정말 언제 끝날지 모른다.
무한전화열차는 대강 아래와 같이 주행한다.
A팀에서 말한대로 나는 B팀에 문의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건다.
"A팀에서 그랬어요? 저희 B팀에서는 다루지 않는 영역이긴 한데.... C팀은 아마 알거에요!"
....
(C팀에 전화를 건다)
......
"아, 저는 C팀 OO차장인데, 그 업무 담당은 아마 저희 C팀 강매니저가 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은 외근 갔으니 오후에 다시 전화해보세요!"
.......
(오후)
............
"제가 강매니저이긴 한데, 저는 그 업무 담당이 아니어서요, 아마 연구소에 D전략팀이 자료를 만들고 있을거에요, 제가 지난번에 본 것 같습니다."
......
....(다른 지역번호까지 누른다)
.........
"안전제일 D전략팀 윤연구원입니다. ....그 자료는 왜 찾으시는데요?..... 기다려보세요 제가 저희 팀장님께 한 번 여쭤보고 드려도 되면 보내드릴게요"
.......
....(거의 퇴근 직전에 전화가 옴)
.......
"네, D전략팀 윤입니다. 이 자료가 맞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받아보시구요.... 더 자세한 내용은 본사 A팀에 문의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
...........(이런..*발...)
그렇기 때문에 83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위에는 A에서 D까지 4개 팀 정도만을 돌고 온 것이라 상당히 짧은 축에 속한다.
보통은 8팀을 돌기도 하며, 인원수로 따지면 그것보다 훨씬 많아질 수도 있다. 무한열차의 끝은 결국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꽤 몸집이 큰 회사에 다니고 있으면 무한열차의 궤도가 지방까지 뻗을지,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미국 지사로 뻗을지 인도 공장으로 나아갈지는 더욱이 알 수 없을 것이다.
IT시대 아니던가, 나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이런 업무문의 전화에 이골이 나있었고 각자 하는 일을 이력서나 상황판처럼 실시간으로 직원 검색창에서 확인할 수 있으면 이런 시간낭비가 확 줄어들 것이 아닌가 하고 많이 답답해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5년,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지만....
전화는 좋은 커뮤니케이션 툴이다.
메신저는 확실히 아무리 공손한 문체로 이모티콘이나 채팅어를 섞어서 써도 무미건조하며 비인간적이다.
인간의 육성이 담긴 전화통화로 훨씬 더 쉽게 빠르게 추진력있게 일이 진행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물론 무한전화열차를 더 많이 본 것이 문제지만!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