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출근해서 보니, 사수는 휴가, 팀장님은 교육, 실장님과 본부장님은 출장으로 부재한 날이 있다.
이런 날을 '어린이날'이라고 한다. 아마 몇 안 되는 합법적인 관내 휴가 느낌을 받는 날이다.
어린이날은 정말 좋다. 출근을 한 느낌이 아니라 돈을 주는 PC방에 착석한 기분을 들게 한다.
그날 해야 할 루틴한 업무나 당장 급하게 발생하는 일을 처리하고 나면 사실상 퇴근까지의 시간이 휴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눈치 볼 사람들이 전원 없으니 그야말로 날카로운 칼퇴도 가능하다.)
어린이날은 여유롭다.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친한 선후배 사원과 나서는 산책도 전부 마음 편하고 즐겁다.
이를 월급루팡이라 하던가? 평소보다 일을 훨씬 덜 하고 같은 일당을 챙겨가는 느낌이니 시급이 폭등하여 내가 마치 글로벌 인재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이날을 거치면서 두 가지를 깨닫는다.
내가 얼마나 평소에 바쁘게 쪼이면서 살아왔는지, 눈치를 보면서 가슴 졸였는지....
그리고 또한 '지시 없이' 스스로 일을 찾아 만들고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에서 얼마나 멀어져 왔는지를 말이다.
어린이날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지만 돌아올 사람은 돌아온다.
휴가라는 것이 퇴직이 아니고서야 영원히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지방 사업장으로 출장을 갔어도 빠르면 오후쯤에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바빠 죽겠다는 생각에 치어서 살면서 "정말 여유로운 날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골백번 생각했지만,
막상 갑작스레 찾아오는 어린이날을 생산적이고 만끽하면서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이날은 상대적이다.
나에게는 아무리 본부장님이나 실장님이 안 계셔도, 팀장과 사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어린이날일 리가 없지만, 아마 팀장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마음 편한 그들의 어린이날일 것이다.
어쩌면, 내 후배들 중 누군가는 내가 휴가이거나 출장일 때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상대적인 것이니까.
항상 어디에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자.
고등학교의 교훈도 아니지만 나의 고교 동창들은 모두 기억하는 초대 교장선생님의 명언이라고 한다.
나는 되도록이면 내가 없음으로써 후배들이나 동료들이 "어린이날이다~!"라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부재가 기쁨인 사람이 된다니....
나는 내가 없으면 아쉽고, 나를 찾아줬으면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가 필요로 한다는 뜻이니까.
82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어린이들이 어린이날을 기다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제 석화되고 풍화되어 가루가 되어 날아가 얼마 남지 않은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고 또 원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던 것 같다.
회사에서의 어린이날도 마찬가지다.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원하는 여유를 얻어서 좋다.
그러나 시원하지 않다. 씁쓸하다. 어린이 시절의 나처럼 정말 활짝 웃고 진심으로 기뻐할 수 없다.
회사의 어린이 날은 결국 어린이 날이 아니다. 그저 수많은 근무일 중 마침 나를 쪼는 사람이 우연히 없는 하루일 뿐이다. 자주성과 진취성이 약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퇴사 한층 더 굳게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성인이다.
꼭 어머니 아버지가 어린이날 선물을 사줘야 하는가?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