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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박 Aug 05. 2020

퇴사 D-77 : 리액션의 굴레

24.

며칠 전 예쁘게 핀 벚꽃이 출근길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길래,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엄마에게 사진을 보내니 반응이 "아저씨냐"였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단톡방에 사진이나 시를 올리던 전무님이 생각난다. 그리고 "아... 어쩌라는 거지?"라고 생각했던 신입사원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작용-반작용처럼, 사무실에서도 액션-리액션은 굉장히 중요하고 일상적이다.


업무상의 액션과 리액션은 자연스럽다. 지시라는 액션을 받으면 대답을 하거나 질문을 하거나 일한 결과를 가져오거나 하는 식의 리액션이 수반된다. (이것조차 안 하면 그냥 태업이거나 무능한 거다.)


작용(Action), 반작용(Reaction), 그리고 상호작용(Interaction)은 회사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매분매초 일어나는 일이며, 반대로 인간사회나 회사가 작동하게 만들어 주는 3가지 기둥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적으로 혼자만 일하게 되는 과제는 없다. 그런 것이 있다면 회사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결국에 당신은 지시를 받든, 보고를 하든 어떤 시점에는 타인(상사)과 상호작용을 하게 되어있다.


문제는 업무 외적인 리액션이 필요한 순간이 엄청나게 자주 있다는 것이다.

부서 단톡방에 앞뒤 맥락 없이 시를 한 수 올리는 전무님이나, 꽃이나 산에서 찍은 풍경사진을 올리는 부장님을 보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가. 리액션의 굴레에 이미 우리는 깊게 빠져있는 것이다.


농담을 좋아하는 상사, 혹은 본인이 유머러스하다고 믿고 있는 상사, 

혹은 자신만의 철학이나 사상에 자신감이 넘쳐서 어떻게든 사랑스러운(?) 부하직원에게 이를 전수해주고 싶은 사람, 반대로 의욕이 너무 충만해서 어떻게든 어필하고 싶은 신입사원 등..... 

리액션이 곤란한 상황은 불현듯, 예고 없이, 그리고 끝도 없이 찾아온다. 


리액션에 모든 것을 거는 직원도 물론 있다.

골보다는 세레모니에 관심이 많고, 공격포인트보다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신경 쓰이는 현재의 몇몇 운동선수들과도 같이, 회사에는 슬슬 진짜 중요한 업무나 과제는 등한시 한채 리액션이 최우선 순위인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회식자리에서 윗사람의 안색만을 살피는 사람이 있다. 

상사는 결국 회식자리에서 가장 열심히 떠드는 사람이다. 혹시 음식점에서 옆 테이블에 회사원 무리로 보이는 그룹이 들어왔을 때,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군지 파악하고 싶걸랑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을 찾아라. 쉽게 알 수 있다.

상사의 말에는 레슨과 교훈이 담겨있기도 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람이 단순히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리액션을 잘해주면 된다.

혹은 정말 부하직원에게 전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 진심으로 귀를 열어야 한다.

문제는 전혀 그런 구분 없이 전문 방청객처럼 리액션을 엄청나게 하는 부류가 꼭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회식자리는 정말 소름 돋는다. 무언의 결투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사에게 보여주기 식 리액션이 꼭 그런 회식자리 같은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상황에서만 부각되는 것은 아니다.


자, 이를테면 본인이 야근을 며칠 연속으로 하다가 그만 코피를 쏟아버렸다. 

저런, 주변에 아무도 없다. 누구도 보지 못했다. 휴지로 코를 틀어막으면서 조금 아쉬워한다.

왜 아쉬울까? 열심히 일한다는 티를 내고 싶고, 코피를 흘린다는 것은 꽤 드라마틱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코피를 흘리기 위해서 일한 것도 아니고, 업무에 대한 완성도와 프라이드로 인해 열심히 달린 것인데,

이 코피를 다른 누군가가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그렇다고 다음날 아침에 "저 어제 일하다가 코피 났어요"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하고 낯간지럽다. 

어느새 나도 리액션을 바라는 회사원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77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인간에게 액션과 리액션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호응을 유도하는 것은 공연장에서나 중요하다. 그렇지만 공연장이라고 해도, 관객의 환호성과 박수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실력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리액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 진심으로 모든 것에 임하고 대하는 수밖에 없다. 

백주대낮 근무시간에 코피가 터지더라도 황급히 휴지로 막고 화장실로 뛰어가 빠르게 씻고 돌아오는 것이 실은 정상이다. 코피가 묻은 휴지를 굳이 책상 위에 늘어놓아야 할까? 이미 멈췄는데도 휴지를 말아 코에 꽂아 넣고 있어야 할까? 그것은 지나가는 동료나 상사들에게 '리액션'을 얻고자 하는 나의 '음흉한' 액션이다.


리액션에는 진실됨과 존중의 마음이 담겨야 한다.

재미가 없고 진짜 맘에 안 드는, 때론 내 자존심을 긁는 얘기에는 진실됨을 담되, 존중의 마음을 앞세워야 한다.

정말로 좋은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진실된 마음을 앞세워야 한다. 리액션에만 신경 쓰다가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빈 깡통은 요란할 수밖에 없으니까.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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