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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종박
Aug 07. 2020
퇴사 D-76 : 회식 회고록 ①
25.
아 회식!
영어로도, 일본어로도, 그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서 번역할 수도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직장음주 문화!
사실 이 에세이 시리즈를 시작한 이유도 결국에는 회식에 대한 회고를 원 없이 하고파서였다.
수많은 직장인들을 울리고 웃기는 회식에 대한 회고록 첫 번째를 남겨보고자 한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엄청난 남초 회사였다.
한 번 인사팀에 아는 선배에게 물어서 구해본 성비는 놀랍게도 9:1, 백분율로 따지면 2% 정도만이 여성이었다.
내 입사 동기가 75명이었는데, 여성이 2명이었으니 얼추 그 정도 비율이 전사적으로 형성되게 된 것이다.
술에 남녀가 어딨겠냐만, 남초 회사일수록 회식을 자주 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2015년 7월의 여름, 신입사원이었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일주일에 4번의 회식이었다.
월요일 인사를 드리고 나니, 곧바로 '실' 회식
그리고 화요일 '팀' 회식, 수요일에는 '본부'회식.... 하루 정도 쉬게 해주는 것 같더니만
금요일에는 옆의 실 이사님이 불러다가 환영한다고 술을 먹었다.
원래 나는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저렴한 맥주집에서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아했고, 1~2학년 혈기왕성한 새내기 시절에는 학회니 동아리니 술자리는 빼지 않고 다이브 할 정도로 왕성한 음주 맨이었다.
그래서 사실 입사 전부터 남초 회사, 그리고 악명 높은 그룹의 이름을 토대로 이미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보내오기도 하였지만, 나는 괜찮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더랬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대학교 1학년 시절 나갔던 첫 미팅보다도 긴장했고 온몸이 기름칠 안 한 로봇과도 같이 삐걱이는 감각은 나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건배사는 무엇을 하려 했지? 주도(酒道)는 이게 맞나? 건배할 때 내 왼손 오른손은 어떻게 해야 하지? 다나까를 쓰는 것이 맞나? 압존법을 쓰기에는 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5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눈에 선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사들은 나라는 신입사원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내 입장에서야 다들 처음 보는 상사, 그리고 처음 겪는 직장생활의 첫 회식이겠지만,
이 분들에겐 아마 20번째? 45번째? 혹은 그 이상으로 겪어보는 신입사원 환영회식일 테니까.
결국
'술 먹을 이유'
로서 나는 아주 적절하게 이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첫날부터 깨달았다.
회식에 이유가 필요할까? 아주 작은 구실만 있으면 된다.
어느 팀 직원이 승진했다, 수상했다는 식의 구실은 정말 양반 중에서도 정 1품, 2품이다.
월말, 분기말이 되어서 회식비나 부서 예산을 소진해야 한다는 이유도 꽤 양반이다.
문제는, 회식의 이유는 정말 아무거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온다. 날씨가 맑다. 흐리다. 전무님 건강검진이 끝났다. 회의가 길었다. 회의가 짧았다.
그날 기분이 좋다. 기분이 별로다. 아니면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등등
혹자는 그런 별거 아닌 이유에서도 마구 회식을 할 수 있는 회사는 부자 회사라고 한다.
대기업이니까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어차피 공짜 저녁 먹는 것 아니냐고 한다.
전부 사실이다. 전부 내가 한 번쯤 두 번쯤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했던 생각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회사 자본의 올바른 사용 방식일까? 그것만이 직원 간 친목과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일까? 알코올의 도움이 없으면 상사와 부하, 세대 간의 소통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상무나 전무, 팀장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감히 그분들의 심중을 이해할 수는 없다. 추측할 뿐.
집에 가기 싫으신 것일까? 직원들을 너무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술이 드시고 싶은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76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회식 자체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 실은 조금 삭막하긴 하다.
아무리 미국이나 서방세계 기업들이더라도 회사의 파티문화는 존재한다.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바를 찾아가거나 클럽에 놀러 가곤 한다. 그러나 역시 한국의 회식과는 다른다.
나는 회사에서 온갖 이유로 온갖 형태의 온갖 수량의 술을 회식에서 마셔왔다.
건강도 실제로 크게 나빠졌었고, 커리어 지속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에 휩싸여서 진즉에 퇴직하고 현재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 확률이 매우 매우 높았다.
어쨌든 버텨오며 5년간 겪으며 봐온, 들어온, 그리고 느껴온 모든 것들을 앞으로 조금씩 남겨보고자 한다.
회식 회고록이 정말로 '21세기까지 존재했던 특이한 문화'라는 23세기 교과서 주제의 사료(史料)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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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기획자 / 서울 서리풀 출생 /서울대 역사&정치외교 / H그룹 기획자 / UCLA M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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