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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은 직장인의 친구이다. 가끔은 카페인이 주인이고 직장인이 노예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수험생이나 과제 제출이 임박한 대학생들보다 더 할 수도 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직장인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커피 없는 커리어는 상상하기 어렵다.
커피를 입수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뉜다.
사내에서 커피를 입수하느냐 아니면 사무실 밖에서 입수하느냐다.
사내에서 획득하는 방법은 아주 편리하다. 보통 돈이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라떼효과, 라떼적금이라고 하던가? 매일 먹을 커피값을 쓰지 않고 아낀다면, 커피 한 잔을 5천 원이라고 했을 때, 20년 뒤면 약 3,700만 원이 모인다는 논리로, 대표적인 '짠테크'중의 하나다.
출근한다면 반드시 커피를 마시고, 그것이 공짜라면 사실상 나는 라떼적금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이니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커피맛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사무실 커피는 거의 복리후생이나 마찬가지다.
작은 종이컵에 타 먹는 황금색 믹스커피를 즐겨 먹는 사람도 있으며,
블랙커피가 되는 가루커피를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카누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몇몇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도 가루커피를 마트에 출시하고 있다.
가끔 드립 커피를 타고 있는 과장님을 볼 때가 있다. 저 직급쯤 되면 역시 여유가 있나 보다.
버튼만 누르면 원두를 자동으로 갈아서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주는 기계가 놓여있다면, 더욱 좋다. 얼음 기계까지 같이 설치되어있다면 금상첨화다.
사내에 카페가 있다면 보통 사원 할인이 되거나 법인카드를 사용해도 무관하니 역시 좋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커피맛에 민감하지 않을 경우에만 해당된다.
커피 기계도 가격에 따라 '급'이 있기 때문에 점점 커피머신이 구려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회사의 경영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구나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공짜 커피를 먹을 수 있다면 좋지만 말이다.
사외에서 커피를 입수할 수밖에 없는 사무실도 정말 많을 것이다.
주변에 어떤 프랜차이즈가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느냐가 관건이다.
보통은 스타벅스, 던킨도넛이 있어주면 최고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워낙에 프랜차이즈가 많다 보니 선택은 임직원의 몫이다. 이 경우 커피맛에 까다로운 사람의 욕구도 충족시켜줄 수 있고 혹시 포인트나 스탬프 적립에 관심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차곡차곡 모을 수 있다.
둘 다 장단점이 있다.
사내 커피는 싸고 편리하지만 맛이 보장되지 않는다.
사외 커피는 선택범위가 넓고 맛이 좋지만 결국 돈을 지출하게 된다.
최고의 형태는 내가 일하는 건물 1층에 스타벅스 같은 외부 프랜차이즈가 있고 회사에서 돈을 다 내주는 경우겠지만.... 어째 거지근성에 도둑놈 심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생각하기를 멈췄다.
만족할 줄도 알아야지.
법인카드를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쓰기 시작하는 것이 직장인 윤리 타락의 첫걸음 아니던가.
나는 최근의 "소확횡(소소하지만 확실한 횡령)" 움직임을 마음속으로 강력히 지지하지만, 사람이 치사하고 쪼잔해지지 않는 선을 찾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고 여긴다. 선 찾기는 결국엔 각자의 몫이다.
78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백수가 되든 아니면 이직을 하든 나의 커피 생활권은 바뀔 것이다.
당신이 커피를 먹는 주요 장소를 지도에 그려보면, 나의 생활권을 꽤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먹던 커피가 그리워질까?
공짜가 좋았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여러분도 퇴사를 하고 싶다면 그전까지 라떼적금과 회사 커피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글을 탈고하다 보니 현자 타임이 쎄게 왔다.
"후후 공짜 커피다. 너무 좋다" 하고 맛도 신경 안 쓰고 들이키던 내가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너무 많이 마셔서 밤에 가끔 심장이 뛰어서 잠도 못 이뤘던 때도 있는 것을 보면 참 '거지근성'이 싹을 트긴 텄구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슬프다.
학생 때 사 먹는 커피는 그냥 가격이라는 일차원적인 기준으로 나눴었는데.... 비싼 커피냐 싼 커피냐.
커피 한 잔에 연봉...월급.....법인카드......복리후생...부서비...소확횡....복지... 이런 단어들이 섞여서 '검정 물'이 담긴 잔 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정말 때가 되었나 보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