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휴가는 눈치게임인가?
당신의 직장 내 문화가 어떤지를 요약하는 좋은 척도 중 하나이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출산하기 3~4일 전까지도 출근을 하셨다고 한다.
요새는 문화가 빠르게 바뀌었다지만, 적어도 내가 입사할 때에 휴가는 여전히 눈치게임이었다.
휴가는 회사가 베풀어주는 관용이나 자비 같은 것이 아니라 법적인 권리이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연간 80% 이상을 출근하면 15일이 주어지고,
3년 이상 근속하면 2년에 1일씩 늘어나게 된다. 여기까지는 마치 군인들의 정기휴가처럼 보장된다.
회사에 따라서 특별휴가나 연차에 포함되지 않는 하기휴가를 주기도 하는데 그야말로 '케바케'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평균 연차 사용일은 15일을 기준으로 며칠일까?
정부와 관광공사의 조사에 따르면 평균 8일 정도를 쓴다고 한다.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사람인의 조사에 따르면 휴가 눈치를 본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사원급에서 41%가 나왔고,
정확히 직급에 따라 계단식으로 낮아져서 부장급은 27%만이 눈치를 본다고 대답했다.
왜 안 쉬는가? 왜 눈치를 보는가?
10명 중 4명이 "업무 공백이 걱정되어서"라고 대답했다. (2위 이유는 '선배나 상사랑 맞춰야 해서')
즉 내가 없으면 누군가가 내 일을 해야 하고, 그것이 결국 선배나 상사들에게 부담을 주고 피해가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휴가 쓰기를 꺼려한다는 것이었다.
군부대가 일이병 없이는 무너져 내리듯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회사에서 사원/대리급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적은 월급을 받고, (그만큼 가장 작은 책임을 지겠지만), 업무량은 그에 반비례해서 많은 사원들을 생각하면 나의 동기들과 후배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짠해지기까지 한다.
정말로 눈치를 아예 안 보고 중요한 회의 날이나 보고일을 무시하고 휴가 일정을 짜버리고 떠나버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아무리 문화가 좋아지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지만, 동료와 타인에게 정말 피해가 갈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사실 답이 없다. 그 '피해'라는 것의 정의도 애매모호하고, 그렇다고 어느 선까지 눈치를 봐야 하는지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그야말로 적적알: 적당히, 적절히, 알아서라고 밖에는 설명해줄 방도가 없다.
연차가 차오르고, 나 자신의 성격과 주관이 뚜렷해지고, 또 요령이 생기면서
2019년이 끝날 무렵 나의 연차 잔여일 수는 입사 후 처음으로 '0'이었다.
사용률 100%라는 숫자로 '연차보상비'라는 작은 용돈은 계좌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2020년은 어느 때보다도 건강한 신체와 정신 상태로 새 그릇 새 포대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휴식은 중요하다. 눈치를 보더라도 취해야 한다.
눈치를 열심히 보는데도 휴식의 '각'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런 곳이라면 나는 당신이 걱정된다.
71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퇴사는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기나긴 기약 없는 휴가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마저도 눈치를 보고 있다.
당장 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갑자기 선수가 경기장에서 뛰쳐나가는 짓이랑 똑같다고 생각했다.
전달할 것이 있고 알려줄 것이 있고, 그것에는 시간이 걸린다.
휴가는 이것의 축소판이 아닐까?
눈치를 보는 것은 좋지만, 왜 보는지 생각해보고 그 부분을 휴가 가기 전에 잘 전달해 놓는다면 괜찮다.
내 책임과 역할을 아예 집어던지고 떠나는 휴가가 아니라면, 충분히 대비하고 대체 업무자를 찾을 수 있다.
너 따위 없어도 회사는 잘만 돌아가, 혹은 겨우 사원 주제에, 라는 말을 했던 상사가
정작 내가 휴가신청서를 들고 찾아왔을 때, 아니 너 하던 일은? 너 없으면 누가 해?라고 따지고 든다면?
잘 생각하길 바란다. 이곳이 당신을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 톱니바퀴로 보고 있는지 말이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