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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y 23. 2021

요즘에도 이런 이웃이 있습니다.

토요일 낮에 남편과 뒷산으로 산책을 다녀오니 문 앞에 전단지 비슷한 게 붙어있었습니다. 떼어서 버려야지 하고는 문 가까이 가서 전단지를 보는데 내용이 하도 예뻐서 활짝 웃음이 나오더군요.


복도식 아파트이고 지은  24  오래된 낡은 강북의 아파트에 삽니다. 여기 이사온지 17 정도   같아요. 18년인가?


메모에 타이핑이 되어 있는 내용인즉, 다음 주부터 3층에 이사 들어올 입주민이 인테리어 공사를 하게 되니 너무 죄송하다는 내용의 안내문이었습니다.

안내문 하나만 붙어있어도 요즘에 이런 예의 바른 젊은 사람이 흔하지 않으니 반가웠을 텐데 작은 비닐백 안에 종량제 봉투랑 마스크가 여러 장 같이 넣어져 있었어요.


우리 집이 부재중이어서 내일 또 찾아뵙고 인사드리겠다고 따로 필기도 되어있는 쪽지를 보고는 얼굴도 안 본 3층의 이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와...! 요즘에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싶었거든요.


일요일 낮, 한참 장조림에 쓸 고기를 삶느라 현관문을 열어놓고 가스불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예쁘고 가녀린 새댁(?)이 죄송합니다~라며 인사를 건넵니다. 공사안내문에 사인을 받아가야 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보통 이런 안내문엔 윗집, 아랫집 두 집만 형식적으로 사인받고 말던데 어찌나 성실하게 2층과 3층을 돌았는지 사인을 빼곡히 다 받아놨더라고요.


3층에 살던 집주인이 24년 동안 입주해 살면서 한 번도 고치지 않은 집이라 전체적인 수리가 필요하다며 2주일이 소요된다는 안내를 해주는데 아마도 새댁이 예쁘지 않았다면 아니... 어제 이런 예의 바른 안내문이 붙어있지 않았다면 못된 아줌마가 얼굴이 붉어지며 짜증스럽게 사인을 해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공손하고 수줍어하는 새댁의 안내에 이 아줌마가 또 오지랖이 발동해서 바쁜 사람을 붙잡고  한 5분가량 수다를 했나 봅니다.


“아이고, 2주 뭐 그 까이꺼, 이런 거 사인 안 받아도 우리 집은 괜찮은데 뭘 우리 집까지 챙겨주고 그래요. 인생 첫 집이에요? 그러니 그리 정성을 들이지. 우리도 여기 집이 처음 집인데 여태 사네요. 하하 어머 얼굴 이쁜 사람이 맘도 이쁜가보다. 여기 복도에 집 안 고친 사람이 드문데 내가 이 집 살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안내문은 처음 받아봤어요. 화장실도 싹 고치겠네? 어린 처자라고 일하는 사람들이 대충 할 수 있으니 꼭 덧방으로 하지 말고 기존 타일 파 내고 새로 깔아달라 그래요. 베란다는 덧방으로 타일 해도 되지만 화장실은 내가 고쳐보니 절대로 덧방 하면 못 써요.”


이러저러한 쓸모없을지도 모를 얘기를 처음 보는 이웃의 젊은 처자에게 수다를 풀고는 사인을 기분 좋게 해 주고 집엘 들어왔더니 남편이 그런 제가 재밌었나 봐요.


“아니, 사인 얼른 하고 보내줘야지. 그리 잡아놓고 그러냐?”


그러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집에만 오래 있었더니 사람만 보면 반가워서 그래. 사람 보면 반가워서 강아지들이 옷자락 붙들고 안 놔주잖아. 하하. 내가 그런가 보지.”


그런 얘길 하며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면서 이 집에 처음 이사 왔던 그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결혼할 때는 중곡동 열 평도 안 되는 원룸에 1년 살다가 딸아이가 생겼고 딸을 그곳에서 키울 수 없다고 다짐하며 무리하게 집을 넓혀 이사 온 게 지금 사는 집이거든요.


복덕방 아줌마 따라 언덕길을 올라와서 이 집 현관문을 처음 여는 순간 집이 저에게 말을 거는 느낌이었어요.


와! 이 집! 우리 집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원룸 전세가 3,500만 원이었고 이 집을 살 때 내줘야 하는 돈이 1억 2천이었는데 대출한도 7천까지 받아도 천만 원 정도가 부족했어요. 집은 너무 사고 싶은데 잔금 날짜까지 돈이 모자라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잔금을 치를 날에 복덕방에 마주 앉은 집주인 부부에게 제가 솔직히 말씀을 드렸던 거 같습니다. 누가 1원 한장 보태줄 사람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없었습니다. 그게 당연한줄 알고 살았어요. 돈은 부족했지만 내 손으로 열심히 벌어서 갚을 자신은 있었거든요.


너무 죄송하지만 남은 금액 750만 원은 제가 반년 안에 꼭 갚을 테니 차용증을 써드리면 안 되겠냐고요. 그 소리를 들으신 집주인이었던 중년 부인이 저에게 그러시더라고요.


“아이고, 젊은 새댁이 너무 예쁘네. 내가 그냥 그 돈 깎아줄게요. 그 집에서 우리 부부 잘 살다 나왔으니 두 사람도 행복하게 잘 살 거예요. 좋은 집이에요. 행복하게 잘 살아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은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집 사면서 집 값 깎아줬다는 얘기는 제가 이후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네요. 지리적 위치가 별로 좋지 않아서 다른 아파트 집값이 껑충 뛸 때에도 늘 거북이 제자리이지만 저는 이 집에 살면서 평탄하게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고마운 집이기도 하네요.

외부적인 상황은 파도가 들이치듯 몰아치듯 썰물 오듯 밀물 내려가듯 오락가락했지만 세 식구, 복닥복닥 오손도손 잘 살 수 있게 해 준 집이기도 합니다.


젊은 새댁인 줄 알았으나 결혼하면서 들어오는 집이 아니고 싱글로 멋진 출발을 하는 이웃주민의 예의 바른 방문 덕분으로 오랜만에 흐뭇하게 웃어봤습니다. 예의 바른 사람이 다 멸종된 줄 알았는데 이사 오면서 떡 돌리는 풍경도 공사하면서 죄송하다고 아이스크림 돌리던 풍경도 과거에 다 박제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308호 입주민 이사 오는 날, 작은 화분이라도 문 앞에 걸어줘야겠습니다. 나에게 너무 기분 좋은 일상의 에피소드를 선물해줘서 마음이 활짝 피더라고요.

요즘에도 이런 이웃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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