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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y 29. 2021

소외감. 우울감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행복한 경험만 있는 사람들은 읽지 말고 패스해. 별로 유쾌한 얘기도 아니니까. 왕따 당하는 사람들만 읽어봐.


제목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그로 끌려고 자극적인 소재 달아놓기도 싫고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얘기도 아니어서 잠시 망설였어.

자려고 누웠는데 종일 낮에 읽었던 기사 하나가 너무 무겁게 나를 잡아끌더라고.

자꾸 내 얘기를 해주라고 마음속에서 충동질이 일어나는 거야. 더 이상 나의 가슴을 메스 칼로 헤집어서 불행을 전시하는 가벼운 아줌마는 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이건 얘기를 해줘야 하겠더라고.


낮에 국내 굴지의 IT기업의 사십 대의 직원이 자살을 했대. 직원들의 왕따와 과부하 걸린 업무와 상사의 질책이었다고. 원인제공을 했던 사람은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

이런 일은 요즘 너무 비일비재했는데 작년에 남편이 다니는 회사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어.

병원 전산실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워낙 병원에 직원들이 많으니까 그런 간호사 선생님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같은 동료들에게 오랫동안 꽤 긴 시간 동안 왕따를 당했던 모양이야. 죽으면서 유서를 남겼는데 그들이 장례식장에 오는 것도 너무 싫다면서 조문도 받지 말라했대.


혹시 누가 또 이 글을 읽을지 모르지만 내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 적게 됐어.


나도 왕따를 직장에서 당한 적이 있어. 내가 그 직장에 뼈를 묻을 각오로 일을 했었거든. 상상을 잠깐 해줘 볼래? 힘들게 대학 졸업해서 취업을 해야 했는데 하필 IMF가 터진 거야. 그때는 다 힘들 때였어. 가방에 이력서를 백장씩 넣고 다니면서 하루에 서너 군데 면접을 보는 건 예사였지.

졸업반일 때 취업준비해야 하니까 알바도 하지 못할 때였는데 수중에 돈 2만 원이 딱 남아있을 때 기적처럼 그 회사에 들어간 거야. 계약직으로 들어간 회사였지만 너무 자랑스러웠지. 그러니 나에겐 얼마나 소중한 직장이었겠니. 목숨줄 같았어.


뼈를 묻을 각오로 일을 했어. 하하. 얼마나 절박했겠니. 그 일을 해야 내가 먹을 음식이 생기고 내 몸 뉘일 곳이 생기는데.

누가 나 도와줄 사람도 하나 없는데 말이야.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거든. 내가 가진건 열심밖에 없어서 열심히 하다 보니 그 회사에서 기적처럼 정규직으로 전환을 하게 되더라고. 2년 만에.


s물산, 인터넷 사업부. 내가 다녔던 회사야. 자랑스럽게 대리라는 직급도 명함 뒤에 적을 수 있었어. 앞만 보고 달려서 내 옆에 뭐가 있었는지 어떤 지형지물이 지나갔는지 풍경도 생각이 나질 않아.


그런데 어느 날부터 기류가 심상치가 않은 거야. 내가 일을 하다 보면 점심시간에 나만 빼고 모든 사람이 다 사라지고 없었어. 처음엔 소외감? 외로움?. 이런 거 느낄 새도 없었던 거 같아.

야근할 일이 있으면 몸 사리지 않고 의자가 부서지나 내 허리가 부서지나 내기하며 일을 했지. 그러다 보니 상사들의 신임은 적금처럼 쌓여가는데 동료들의 신임은 마이너스 통장처럼 자꾸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더라고.


나의 일만 아는 성격도 한몫했겠지. 왕따는 전염병 같이 움직여. 나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왕따의 꼬리표가 붙으면 나를 피해 다니거든.

내가 혼자 스스로 그렇게 느낀 부분도 많이 있겠지만 내 직감이 틀리지도 않을 거야. 괜히 끼기 싫어해, 다들.

그냥 멀리서 지켜보며 쯧쯧, 안됐군. 그러게 잘 좀 하지. 이런 소리나 할 수 있겠지.


그 이후로 피해의식이 좀 생기기도 했었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됐을 시점이었는데 그때 하필 왕따가 시작이 되어서 굉장히 심해지기 시작했어.

내 기억으론 한 9개월 정도 당한 거 같아.

나중엔 내가 그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제발 나랑 같이 밥 한번 먹어줄래요?’


한 번은 그들과 친목을 도모하려고 내가 영화를 보자고 용기 있게 제안했었어. 이미  그때의 나는 많이 위축되어서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였는데 용기를 낸 거지.

나를 왕따 시키지 않고 있다는 증거를 보이려 했던 그들도 흔쾌히 응했지. 내가 건넨 영화표를 들고 그들이 내 옆에 앉지 않으려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걸 보게 됐어.

그리고 또 여러 상황들이 있었는데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도 버티려 했던 그 목숨줄 같은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야 할 일이 생겼었어.


내 앞에 앉은 왕따 주동자랑 왕따 대모가 같이 회사 메신저로 내 욕을 하다가 그 욕이 나한테로 잘못 전송이 된 거지.

그때는 못 참겠더라고. 그래서 왕따 주모자를 복도로 불러내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곧바로 그 회사를 나와버렸어.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 일로 왕따 주모자가 굉장히 곤란해졌었단 얘길 들었어.


그날 이후 그 직장에 돌아가지 않았어. 내가 낸 사표는 한 달 후에 수리가 된 걸로 알아. 상사들의 권유와 격려가 있었지만 울면서 그랬던 거 같아.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무서워서 싫어요’


그때는 그랬어. 그 일을 잊는데 2,3년 정도 걸렸던 거 같아.

요즘엔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심리상담도 많이 발전하고 약도 좋아져서 우울증 초기에 병원엘 가게 되면 금세 호전이 가능해.

내 발로 찾아간 병원 약을 그리 오래는 안 먹었던 거 같아. 상담비가 비싸긴 하지만 그 값이 필요한 꽤 고도의 기술이니 제발 돈 생각하지 말고 심리상담도 꼭

같이 받길 권하고 싶어.


지금 왜 이 얘길 하냐면 제발 죽지 말라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일이다 뭐 이런 구태의연한 소리 안 할게. 나 지금 매우 행복하거든.

비록 내 평생 애증의 대상이었던 친정에서 민형사 고소를 당하고 알량한 아빠의 형사합의금 덕분으로 내가 친정에서도 고초를 겪기도 하고 말이야.

뭐 하나 쉽게 얻은 게 없는 일상이긴 하지만 나 지금 매우 행복하게 잘 살 거고 있거든.


베란다에 심어놓은 방울토마토에서 조그만 진주 같은 알갱이가 생길 때 환호성을 지르면 남편이 불난 줄 알고 양치를 하다가 쫒아나와.

내가 그렇게 흥이 많은 사람이거든.

요즘엔 근력 운동한다고 뒷산을 자주 다니는데 산에서 나는 아카시아 향 맡고는 혼자서 좋아서 방방 콩콩 뛰어다녀.

혼자서 재밌게 했던 일들이 무수히 많아. 날 버리고 간 엄마가 동양자수를 했었거든. 그런데 그 엄마에게서 내가 손재주를 물려받았더라고.

남들은 도저히 그게 왜 재밌는지 모르겠다고 난리인데 나는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재밌어해서 혼자서 3박 4일 자수만 하라고 해도 할 수 있게 잘하고

음식도 곧잘 잘 만들어 먹다 보니 그걸로 돈도 벌게 됐어.


남들은 내가 전산을 대학에서 배웠다고 하면 놀래. 지금은 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근육만 발달해서 디지털과는 거리가 아주 멀어졌지만 예전엔 내가

마케팅 부서에서도 일을 했었거든.


나중에 나중에 심리 상담하면서 알게 된 건데 선생님에게 내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었어.


“선생님, 그 회사 나올 때 제가 완벽하게 패배한 줄 알았거든요. 제가 그들에게 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살아보니 아니더라고요. 인생은 지고 이기는 게임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설령 그때 내가 그들에게 졌다고 해도 지금 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들이 되었어요”


선생님이 그 말을 듣고 그 얘길 해주셨던 기억이 나.


“ 꼭 모든 집단에서 어떤 조직에서든 이겨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내가 그걸 힘겨워서 못 견디겠으면 나오는 것도 잘한 일이에요”


그 얘길 돈을 주고 들어야 하냐고 할 만큼 간단한 진리일 수도 있지만 나에겐 꽤 중요한 명제였어. 힘들어 죽겠는데 그걸 꼭 버티고 이겨내려 애쓰는 거 하지 마.

그거 아니면 그 길 아니면 죽을 거 같지? 절대 그렇지 않아. 인생의 기회가 어느 방향으로 키를 돌려서 나를 어떤 삶으로 이끌지는 아무도 몰라.

회사에서 또는 소속된 커뮤니티에서 이유모를 왕따를 당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나의 두서없는 얘길 꼭 해주고 싶었어. 절대로 죽지 마.


살아보니까 말이야. 얼마 안 살았지만 왕따를 당했던 그 기억이 벌써 십몇전의 일이더라고. 내 삶의 많은 흉터들이 내 안에 남아있지만 오늘이 좋으면 다 괜찮아지더라.

당신이 살아낼 내일이 괜찮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하나님이 그렇게 가혹하지만은 않으셔. 어떻게든 살 구멍은 마련해주시고 그리고 과거의 상처 껴안고 살만한 좋은 일들 한두 가지씩은 꼭 주시더라고.


내 경험이 타인에게 도움이 될 테니 하는 어쩌고 저쩌고의 교훈 타령을 하려고 하는 게 아냐.

지금 혹시 누가 또 왕따를 당하고 있다면 아줌마의 이 얘기를 듣고 잠시라도 눈물을 닦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고.


사람은 타인의 불행이 나와 비슷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나의 상황의 위로가 되거든.

그런데 어지간해선 자신들의 왕따 경험을 잘 털어놓지 않으려 하기도 하니까. 그건 마치 내가 예전엔 하자가 있는 상품이었어요 하고 광고하는 거 같잖아.


마침 이 아줌마가 익명으로 글을 쓰고 있기도 하고 그리고 나에게 그런 경험이 있는데 말로 풀어낼 재주가 또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얘기할 자신은 있더라고.

이젠 이런 얘길 아는 지인들에겐 절대로 하지 않긴 해.

사람들은 밝은 얘기, 재밌는 얘기만 듣고 싶어 하거든. 남의 불행엔 관심이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도돌이표 노래처럼 계속 나오던 넋두리를

나이가 드니 이젠 안 하게 되더라고.


그랬던 내가 오늘 낮에 본 기사에 잠이 안 와서 쓰게 됐어.


이 글을 새벽 두 시에 쓰고 있는데 아침까지 묵혀놨다가 다시 보고도 괜찮으면 발행을 하려고 해. 하하

새벽의 감성으로는 편지나 에세이는 쓰는 게 아니더라.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마도 내가 아침의 맨 정신으로도 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길 바라고 있는 거겠지?

행복한 경험만 있는 사람들은 읽지 말고 패스해. 별로 유쾌한 얘기도 아니니까. 왕따 당하는 사람들만 읽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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