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을 놓을 자리가 협소한 저희 집엔 이젠 화분을 걸어줘야합니다. 물을 흠뻑 머금은 후쿠샤꽃이 반짝거리는 아침입니다.
4월 29일은 저희 집 부부가 결혼한 지 20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고 보니 기념일에 뭘 챙기는 게 그다지 설레는 일이 아니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남편은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평일에 휴가를 냈다고 해서 의아한 얼굴로 눈이 동그래져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저보다 더 커진 눈으로 남편이 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어?!”
그게 뭐 대수냐는 저의 표정 밑에 슬쩍 귀찮음도 숨겨져있었나 봅니다. 잔뜩 서운해진 남편이 볼 이맨 목소리로 툴툴거립니다.
“ 나는 기껏 놀러 갈 스케줄 다 잡아놓았구먼 그걸 잊어버리냐?”
남편이 휴가로 낸 금요일 아침엔 예약받아놓은 물김치 두통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덕분으로 놀러 가는 거보다 물김치 담을 일로 맘이 더 분주했었거든요. 서둘러서 움직인다고는 했으나 열무 절이고 보리밥 쪄서 물김치 담는 일이 그리 간단할 리가 없습니다. 새벽부터 바지런을 떤다고 시작한 일이 오전 시간을 거뜬히 넘겨버렸습니다.
놀러 갈 스케줄표를 붙잡고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너무 미안해져서 얼른 옷을 갈아입고 따라나선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가기로 했던 강원도가 아닌 용인으로 차가 움직이는 겁니다.
“ 어? 왜 이길로 가?”
“ 너 좋아하는 꽃집 간다. 너 솔직히 바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 오늘 가서 실컷 꽃 골라. 내가 해줄 건 이런 거밖에 없다”
식물 집사가 된 제가 성지처럼 여기는 용인에 위치한 대형 꽃집을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한참 그곳이 요즘엔 튤립 천국으로 만발하던 시기였거든요. 그런데 워낙 우리 집에서 찾아가기가 멀어서 남편이 겨우 꽃 사러 가면서 거기까지 가야 하냐고 길을 나서길 싫어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제야 제 얼굴이 활짝 펴서 함박웃음으로 답해줬습니다.
“ 아이고 ~~ 신나라! 내 맘을 어찌 알고!”
저만의 성지인 용인의 식물원은 워낙 유명해서 주말엔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 평일에 가니 온통 꽃밭에 몇 사람 없더라고요. 한가한 그곳을 두어 시간 실컷 돌아다니며 집에 데려갈 아이들을 신중하게 골랐던 거 같습니다. 점심 나절에 도착했는데 집에 가려고 나서니 해거름이 질 무렵이었습니다. 실컷 꽃구경하고 작은 집에 걸어둘 행잉 식물과 제라늄을 트렁크에 싣고 돌아오는 마음이 너무 좋았습니다. 퇴근길이라 차가 막히는데도 운전하는 남편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입니다.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으니 남편이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서 그렇지”
아침에 식구들이 다 빠져나가고 설거지해놓고 청소도 깔끔히 해놓고 지난 금요일 들여온 식물들에게 물을 흠뻑 줘봅니다. 작은 집에 더 이상 식물 둘 곳이 없어 걸어두는 행잉 식물로 후쿠샤를 들여왔는데 보석 왕관처럼 꽃들이 한가득 늘어져있습니다.
순간 사는 게 별거냐 싶은 마음이 듭니다. 기념일에 손가락에 반지 안 껴도 좋은 곳에 놀러 가서 기분 안내도 남편이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을 알아내서 스스로 움직여준 일이 결혼 20년 동안의 최고의 선물이 되어줬습니다. 오래 살고 볼입니다. 특히나 부부는 더 그런 거 같습니다.
투닥거리며 쌓아온 세월인데 그 벽돌 틈틈 히로 정이 빼곡히 접착제로 들러붙어 서로의 빈틈을 메꿔준 세월입니다. 이렇게 내 맘 알아주는 남편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