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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y 08. 2021

첫 여행, 마지막 여행.

어쩌면 그 여행이 할머니와 아빠와 동생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형편이 제일 괜찮을 때이기도 했고 이혼한 여동생이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이기도 했고 (내가 보기엔) 4년마다 조울증 발작을 일으키며 아파하던 남동생이 드디어 완치인가 싶을 정도로 제일 멀쩡한(?) 시절이기도 했다.


느닷없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동생들과 아빠와 할머니만 모시고 해외여행을 꼭 다녀오고 싶어 졌다. 할머니에게 비행기를 태워드리고 싶기도 했고 아빠에게 좋은 호텔에서 묵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동생들도 흔쾌히 그 의견을 따라줘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올케가 일본 여행사를 다니던 덕분으로 렌터카를 빌렸고 숙박업 소도 최상급의 호텔로만 가장 합리적인 금액으로 견적을 내서 떠난 여행이었다. 난생처음 타보는 비행기 안에서 창 밖의 구름에서 눈을 못 떼던 구순이 넘은 할머니를 보고 여동생과 깔깔거렸다.

낮에는 아빠와 할머니에게 좋은 구경을 하나라도 더 시켜드리려고 애를 쓰느라 바빠서 주위의 경관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좋은 물건을 쇼핑할 기회도 없었다. 그런 극한의 체험이 있으려나 싶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정이긴 했는데 효도한다는 생각에 충족해서 스스로 만족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저녁엔 남동생과 여동생과 같이 맥주를 실컷 마시며 깔깔거렸다. 처음으로 어린 시절을 얘기하며 눈물 흘리지 않았던 술자리였던 거 같다. 우리는 서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경계했는데 그 여행지에선 이상하게도 깔깔거리며 어린 시절을 얘기했었다. 아마도 좋은 여행지에서의 행복감에 취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하하, 누나 그거 생각나? 우리 여름에 신발이 없어서 말이야. 슬리퍼 앞쪽이 반절 잘라져 나갔는데도 그걸 신고 학교를 갔잖아”


“그랬었지, 나는 비 오는 날이 제일 싫었었어. 비만 오면 할머니가 우산 빌리러 골목 밖으로 비를 맞고 뛰어다녔잖아”


아빠는 수시로 돌발행동을 해서 우리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5만 엔이 넘는 선글라스를 사달라고 떼를 서서 내가 할머니에게 엄청 화를 냈던 기억도 선명히 난다.


“할머니, 아빠는 정말 왜 저렇게 평생 철이 없는 거야! 50만 원 넘는 선글라스가 말이 돼?”


후쿠오카의 5성급 호텔 조식 뷔페에 할머니의 이동을 돕는 유모차 안에 몰래 한국 소주를 숨겨 들어오셔서 아침을 기분 좋게 먹으려던 나를 화나게 했던 일도 기억이 난다. 그때에도 할머니에게 화를 냈었다. 나의 지청구를 받은 할머니가 자기 자식을 구박한다고 아침 조식을 먹으면서 눈물을 손수건에 찍어내셨었다.

구순이 넘은 할머니에겐 칠순이 넘는 아빠가 아직도 가슴이 아픈 아들이었으니까... 손녀가 아무리 구박을 해도 그 자식이 애달파 호텔 조식보다 아들이 좋아하는 소주를 맘 편히 못 먹는 게 더 서러우셨던 거다.


여행을 다녀오고 한참 후에 할머니에게 직접 들은 얘기인데 그 날 아침의 눈물엔 나에 대한 다른 일로 서운함도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정은이 네가 거기 맛난 것이 천지로 많더만은 나한티는 먹으라고 갖다 주는 것이 다 풀때기고 먹을것도 없더란 말이다. 나중에 지연이가 이것저것 좋은걸로 갖다주더만? “


내 딴에는 할머니가 먹을만한 걸 챙겨드린다는 게 할머니 입장에선 제일 맛없는 걸 수도 있다는 걸 그때 또 처음 깨달았던 것도 같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아빠가 또 술을 한잔 하시고 나에게 전화를 하셨던 적이 있다. 그날의 대화는 선명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거 같다.


“여행도 내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재밌는 것이더라. 내가 돈을 하나도 안 갖고 갔더니 구경을 해도 신이 안 나더란 말이다.”


여행을 니 덕에 잘 다녀왔다는 소리도 하셨던 거 같기는 하다. 아빠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좋은 여행이었던 건 맞지만 나의 미숙함으로 내가 원하는 구경만 시켜드린 걸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기도 했던 추억이다.


휴일에도 재수생 딸에게 새벽 6시, 이른 아침을 챙겨 먹이고 있었는데 삼치구이를 먹던 딸이 말을 건넨다.


“엄마, 오늘이 어버이날이더라?”


졸음이 덜 깬 채로 개수대에 담긴 설거지를 하며 하품이 썩인 대답을 했었다.


“응, 그렇더라. “


재수생 딸 학원 보내야 해서 이젠 토요일에도 늦잠을 못잔다. 졸려서 투덜거리면서도 잠이 깨버려 다시 자기도 애매해져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는데 카톡음이 울린다. 딸이 보낸 콜라겐 선물이 도착을 했다. 메시지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엄마, 오글거리니까 말은 생략할게 ^________^’


갱년기 엄마를 위한 콜라겐을 보낸 딸의 선물 기프티콘을 받고 좋고 행복해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난다. 아빠가 사달라한 선글라스. 그거 사드리고 말걸.

이제는 보지도 못하고 안부도 모르는데 내가 어버이날, 이 아침에 그 여행에서 아빠에게 5만 엔짜리 선글라스를 사드리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플 줄은 몰랐다. 이젠 어버이날이 되어도 아무것도 해드릴수 없게 될줄 그 때는 몰랐다.


빨간점퍼를 입으시고 흰바지에 흰구두를 맞춰입고 손에는 기린 맥주를 들고 멋지게 유후인 골목을 활보하던 그 때의 아빠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히 떠오른다. 그 여행이 아빠와 할머니와 동생들과 오롯이 보냈던 첫 여행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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